내가 외로운 줄 알았는데, 니 택배가 급했구나
“명절에 혼자 있으면 외롭지 않아?”
혼자 넷플릭스 정주행 중인데, 회사 동료가 메세지를 보냈다.
하나도 외롭다. 지금 범인이 누군지 궁금하다. 명절내내 밀린것들 다 정주행 할 예정이다.
“밥은 잘 챙겨 먹고?”
치킨 먹고 있다. 다리 3개 다 내 것이다. 평소보다 사정이 좋다. 다리가 3개라고 기형이란 생각은 안한다. 운이 좋은것일 뿐이다.
그래도 나를 생각해서 연락했나 싶어 답장을 한다. 부모님도 밥 먹었냐고만 물으시는데, 제법 다정한 동료네, 평소에는 비꼬더니, 명절이라 양심의 가책을 받았나? 조상의 질책이라도?
“회사에는 누가 남아 있나?”
갑자기 회사가 나온다,,, 그걸 내가 아냐? 내가 회사 경비냐?
“왜?”
“내 택배가 거기로 가서. 너 집에만 있으면 답답할 텐데 잠깐 나갔다 와도 좋잖아. 너 혼자에 명절에 어디 안가고, 회사랑 가깝잖아.”
아. 내 안부가 택배 배송 조회였구나.
상대는 말로 나를 돌봤고 나는 몸으로 상대를 돌봐야 하는 거냐?
이게 ""직장 동료""의 우정인것이냐?
그런데 과거 상대가 부탁할때, 나도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다.
“너는 역시 믿을 만해.”
“이런 건 너한테 부탁해야 안심돼.”
이 말을 들으면 괜히 꼼꼼해진다. 대충 해도 될 일인데 사진까지 찍어서 보내준다. 상대가 맡긴 일에 , 나는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걸어 버린다.
고맙다는 답이 오면 흐뭇했다. 무언가 성취감도 느낀다.
명리에서 인성의 헤아리고 받아주는 작용이 내 사정을 뒤로 미루는 쪽으로 쓰이면 이럴 수 있다. 상대가 곤란한 이유는 자세히 이해한다. 내가 쉬어야 하는 이유는 금방 잊는다. 거기에 필요한 사람이고 싶은 마음까지 붙으면, 부탁을 들어주면서 스스로 만족도 얻는다.
그래서 단순히 “왜 자꾸 이용당하냐”는 말로는 잘 안 풀린다. 나도 그 관계에서 받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칭찬 몇 마디가 꽤 맛있었던 거다.
이번에는 답장을 바꿔본다.
“택배 받을 사람은 네가 직접 찾아봐. 나는 회사 안 갈 거야.”
“나는 네가 혼자 있어서 걱정돼서 그런 건데.”
고맙다고 하면 다시 부탁으로 돌아갈 것 같다. 그렇다고 네 걱정은 전부 가짜라고 따지자니, 치킨이 식는다.
“나는 잘 쉬고 있어. 택배는 못 받아줘.”
답장이 잠깐 끊긴다.
들켰나? 당황했나? 내가 너무 정확하게 찔렀나?
갑자기 심리전의 고수가 된 기분이다. 드라마는 멈추고 상대가 타자를 치나 본다.
회사에 안 갔을 뿐이지 아직 퇴근을 못 한 기분이다.
신경전이 드라마보다 흥분시킨다.
관성의 기준과 조절은 여기서도 필요하다. 부탁을 들었다고 내 의무가 된 것은 아니다. 맡을 일을 정하고, 맡지 않을 일도 정해야 한다. 상대가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해줄 때까지 허락을 기다리면 내 휴일은 계속 저쪽 손에 있다.
볼 것은 그다음 행동이다. 거절을 받아들이고 다른 방법을 찾는가. 아니면 걱정하던 사람이 갑자기 내 성격을 걱정하기 시작하는가.
문자가 들어왔다.
“너 요즘 좀 차가워진 것 같다.”
택배를 안 받았더니 인격이 변했다. 그 안에 내 인성이라도 들어 있나.
물론 안부 뒤에 부탁이 있다고 모두 계산적인 사람은 아니다. 서로 부탁하고 도우며 살 수 있다. 다만 못 해준다는 말을 할 때마다 친절이 회수된다면, 그 친절에 붙은 조건은 봐야 한다.
잠시 뒤 다시 메시지가 온다.
“알았어. 다른 사람한테 물어볼게. 그래도 너만큼 꼼꼼한 사람은 없는데.”
그럼 그렇지. 내가 좀 꼼꼼하긴 하지.
그래서 또 물어본다. 나의 꼼꼼함을 자랑하기 위해서 ,
"택배 혹시 갈비니? "
"회사에 두면 상할까봐, 나 먹으라고 배려한거니? "
상대방이 답을 안한다.
과연 내 촉이란,,,
차키를 쥐고 문을 열고 나간다.
회사의 CCTV는 고장난 것이 갑자기 기억난다.
공짜로 갈비 먹을 기회가 온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