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사이 공감이 우선이다.
“오늘 회사에서 진짜 짜증 났어.”
배우자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상사가 퇴근 직전에 일을 줬고, 옆 사람은 자기는 관계없는 척 빠져나갔고, 결국 혼자 남아서 처리했다고 한다.
듣다가 한마디 한다.
“그러니까 평소에 거절을 좀 해야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상대 표정이 더 안 좋아진다.
왜지?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래서 설명을 더 한다.
“네가 계속 받아주니까 그러는 거야. 나 같으면 처음부터….”
이제 회사 이야기는 끝났다.
부부싸움이 시작된다.
회사에서 한 번 혼나고, 집에 와서 보충 수업까지 받는 기분이니까.
우리는 가까운 사람이 힘들다고 하면 생각보다 빨리 선생님이 된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왜 같은 일이 반복되는지.
특히 남자들
특히 사주가 문제 해결 구조인 사람들 (식신제살이라든지 )
상대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개선안이 나온다.
회사에서도 이 정도 속도로 보고서를 쓰면 좋아하겠지만, 보통은
집에서만 컨설팅 능력이 폭발한다.
그런데 상대가 지금 해결 방법을 모를까?
상대가 바보면, 당신은 왜 선택했는데?
거절해야 하는 것 안다.
남의 눈치를 너무 보면 피곤한 것도 안다.
그 상사 성격 안 바뀌는 것도 안다.
다 안다.
그냥 오늘 너무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힘들다는 말을 했는데, 왜 네가 힘들게 사는지 설명을 듣게 된다.
맞는 말이라 더 짜증 날 때도 있다.
반박하기는 어려운데 위로는 하나도 안 된다.
내 편이 있을 줄 알고 왔는데, 여기도 심사위원이 앉아 있다.
집에 심사위원 두 명이면 참 피곤하다.
서로 채점한다.
둘 다 상대 점수에 불만이 많다.
그런데 재심도 같은 사람이 한다.
이런 일은 집안일에서도 생긴다.
“나만 집안일 하는 것 같아.”
이 말을 듣자마자 기억력을 최대한 끌어올린다.
“나 어제 분리수거 했잖아.”
분리수거 한 건 사실이다.
그것을 부정하면 안 되지...
그게 얼마나 피곤하고 힘든 일인데?
지난주에 청소기 돌린 것도 생각난다.
아이 학원 데려다준 것도 있다.
찾아보니까, 너무 많이 일한것 같다.
갑자기 가사 노동 실적 발표회가 열린다.
상대는 요즘 너무 지친다고 말했는데, 나는 내가 억울하지 않다는 증거를 제출하고 있다.
물론 상대가 “당신은 아무것도 안 하잖아”라고 하면 억울할 수 있다.
실제로 한 일까지 없던 것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다만 그 억울함부터 처리하려고 하면, 처음 꺼낸 사람의 피곤함은 또 뒤로 밀린다.
“요즘 많이 몰렸지. 오늘 설거지는 내가 할게.”
이 말부터 하고, 분담 이야기는 조금 뒤에 해도 된다.
설거지하면서 이야기하면 더 좋고...
소파에 누워서 “당신 힘든 것 이해해”라고 하면, 이해한 사람이 왜 계속 누워 있는지도 궁금해지니까...
누워서
나도 피곤해...
그건 공감이 아니다.
명리에서 관성(官星)을 규칙과 기준, 책임의 쪽으로 읽는다.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까지가 각자의 몫인지.
어떤 행동이 맞는지.
함께 살려면 이런 기준도 필요하다.
그런데 집에서도 기준만 계속 들이대면, 하루 종일 평가받는 느낌이 된다.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집에서는 배우자에게.
퇴근했는데 평가자는 교체되고 평가가 계속된다.
인성(印星)을 보호하고 받아주는 쪽으로 풀어보면, 가까운 관계에서 왜 그런 기능이 필요한지 이해하기 쉽다.
물론 여기서 이야기하는 인성은 "정인"인 경우가 많다.
공감 능력이 필요하단 이야기다.
오늘 조금 못했어도 일단 들어주는 자리.
말을 완벽하게 정리하지 못해도, 무슨 마음으로 하는 말인지 알아보려는 태도.
그렇다고 인성이 있으면 다 공감을 잘하고, 관성이 있으면 다 잔소리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같은 사람도 밖에서는 잘 들어주다가 집에 와서는 판사가 된다.
남의 실수에는 “그럴 수도 있죠.”
배우자의 실수에는 “내가 몇 번을 말했어?”
가까우니까 더 잘해주기도 하지만, 가까우니까 함부로 생략하는 것도 많다.
상대의 사정을 듣는 과정 같은 것.
공감한다고 상대 말이 전부 맞다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말하면 속상했겠다.”
이 말을 했다고 회사 상사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지는 것은 아니다.
“혼자 하는 것 같아서 지쳤구나.”
이 말을 했다고 앞으로 집안일을 전부 맡겠다는 계약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일부 상대는 이제 앞으로 니가 다해라고 할 수 있다.
그때는 엄마한테 전화해서, 내가 내 발등을 찍었어요.
그때 반대했을때 헤어졌어야 하는 건데 ,, 그래라
지금 그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 먼저 알아주는 것이다.
사실관계는 나중에 더 들어볼 수 있다.
잘못한 부분이 있으면 그것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마음이 꽉 막힌 사람에게 논리를 계속 넣으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컵이 꽉 찼는데 물을 더 붓고 있다.
안 들어간다고 수압을 높인다.
목소리도 커진다.
이제 둘 다 젖었다.
특히 조심할 말이 있다.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래.”
말하는 사람에게는 그 정도일 수 있다.
그런데 듣는 사람은 오늘 그 정도를 열 번쯤 겪었을 수도 있다.
아침부터 아이 준비시키고.
출근해서 눈치 보고.
퇴근길에 장 보고.
집에 와보니 아침에 놓인 그릇이 그대로다.
그릇 하나 보고 화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릇 하나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또 너무 열심히 분석해서 설명까지 해줄 필요는 없다.
“당신은 누적된 스트레스를 그릇에 투사하고 있어.”
그릇이 날아올 수도 있다.
깨지면 또 치워야 한다.
그냥 물어보면 된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내가 뭘 하면 좀 낫겠어?”
그리고 대답을 조금 들어보면 된다.
중간에 자기 비슷한 경험으로 넘어가지 말고.
상대 상사보다 자기 상사가 더 이상하다는 대회도 열지 말고.
들으면서 반박할 문장을 준비하면, 상대도 대충 느낀다.
저 사람 지금 듣는 게 아니라 자기 차례 기다리는구나.
물론 감정이 있다는 이유로 막말까지 받아줄 필요는 없다.
힘든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배우자를 함부로 대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힘든 건 알겠는데, 나한테 그렇게 말하면 나도 아파.”
이 말은 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표정이 죽일듯이 말하면 안된다.
공감도 한 사람만 계속 하면 지친다.
매번 한쪽은 화를 내고, 다른 쪽만 이해해야 한다면 그것도 같이 봐야 할 문제다.
다만 평범한 하루의 서운함까지 매번 옳고 그름으로 재판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해결할 일은 남는다.
집안일이 몰렸으면 나눠야 하고.
같은 말에 계속 상처받으면 말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회사에서 반복해서 당하면 거절할 방법도 찾아야 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서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까 네가 문제야.”
이렇게 문을 열면, 그 뒤에 아무리 좋은 해결책이 있어도 들어가기 싫어진다.
부부 사이에는 맞는 말을 하는 능력도 필요하지만,
그 말을 서로 들을 수 있게 하는 능력도 필요하다.
오늘 배우자가 힘들었다고 하면, 일단 조금 들어보자.
좋은 해결책이 떠올라도 잠깐 가지고 있어도 된다.
오늘 안 말한다고 특허를 뺏기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이야기 끝에 한마디 해도 된다.
“오늘 고생했네.”
단, 그다음에 바로 붙이지 말자.
“그런데 너도….”
그러면서, 과거 첨만남부터 쌓아온 것들을 꺼내지 말자.
앞에서 쌓은 것, 그 ‘그런데’가 다 가져가고
이자도 붙여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