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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자리에서 또 막히는 사람: 통과하지 못한 시험은 옷만 바꿔 다시 온다

sean··읽음 2
같은 자리에서 또 막히는 사람

자꾸 같은 자리에서 막힌다면, 운이 나빠서가 아니다. 아직 통과하지 못한 시험이 그 자리에 남아 있어서다.

사람이 바뀌고, 회사가 바뀌고, 사는 도시가 바뀌어도 그 시험은 옷만 갈아입고 다시 온다. 통과할 때까지 온다.

그래서 막힌 자리는 벌을 받는 자리라기보다, 붙잡혀 있는 자리에 가깝다. 거기서 배울 것이 남아 있으니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막힘은 어려움도 실패도 아니다

셋은 비슷해 보이지만 꽤 다르다.

어려움은 바깥에 있다. 돈이 모자라고, 문이 안 열리고, 사람이 안 도와준다.

실패는 판정이다. 이번 판에서는 안 됐다는 결과일 뿐이다.

막힘은 이 둘과 구별되는 특징이 세 가지 있다.

첫째, 되풀이된다.

한 사람에게 다 퍼주고 배신당한다. 사람을 바꿔서 또 다 퍼주고, 또 배신당한다.

회사를 옮긴다. 석 달쯤 지나면 숨 막히는 그 느낌이 똑같이 돌아온다.

살을 뺀다. 다시 찐다. 또 뺀다. 또 찐다.

일은 다른데 모양은 같다. 같은 모양이 되풀이된다는 것은, 그 밑에 같은 뿌리가 있다는 뜻이다.

둘째, 같은 문제가 다른 얼굴로 온다.

막힘은 같은 사람, 같은 사건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구조를 되풀이한다.

그래서 매번 "이번엔 다르다"고 느낀다. 그리고 매번 같은 곳에 도착한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하던 말이 있다. "숫자만 바꿨는데 왜 또 틀리니." 그 문제가 평생 따라다니는 것이다. 숫자만 바뀐 채로.

셋째, 이미 애를 써 봤다.

막혔다는 건 몰라서 못 하는 게 아니다. 방법을 써 봤는데도 그 고비를 못 넘는 것이다.

기계가 걸렸을 때를 떠올려 보면 된다. 톱니는 여전히 돌고, 벨트도 돌고, 힘은 다 들어가는데 물건이 안 나온다. 헛심만 쓴다.

그러니 막힘은 실력 문제가 아니라 패턴의 문제다.

그 패턴은 내 생각 안에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 자체에 붙어 있다. 그래서 잘 안 보인다. 눈은 세상 모든 것을 보지만 자기 눈알은 못 본다.


왜 하필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가

피하면 편하니까

심리학에 부적 강화(negative reinforcement)라는 말이 있다. 무언가를 안 했더니 불편한 느낌이 사라지고, 그 편안함이 다음에도 또 안 하게 만드는 고리다.

걸기 싫은 전화를 안 건다. 긴장이 바로 풀린다.

거절을 못 해서 그냥 하겠다고 한다. 어색함이 바로 사라진다.

싸우기 싫어서 입을 닫는다. 언성이 바로 낮아진다.

편해지는 건 잠깐이고, 값은 뒤에서 조용히 계속 치른다. 그렇게 막힌 자리는 매번 먹이를 받아먹고 점점 단단해진다.

그래서 사람을 막는 것은 대개 깎아지른 절벽이 아니다. 매일 지나는 골목에서 짖는 개 한 마리다. 절벽이면 돌아갈 생각이라도 할 텐데, 개는 매일 만나니 매일 피한다.

끝나지 않은 일은 앞에 쌓이니까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이렇다. 1920년대 베를린의 한 식당에서 심리학자 쿠르트 레빈(Kurt Lewin)이 웨이터를 보고 있었다. 웨이터는 계산이 안 끝난 테이블의 주문은 하나도 안 빼고 기억하는데, 계산이 끝나자마자 깨끗이 잊어버렸다.

레빈 밑에서 공부하던 블루마 자이가르닉(Bluma Zeigarnik)이 이걸 실험으로 옮겼다. 1927년에 발표한 연구다. 사람들에게 스무 개 남짓한 작은 과제를 시키고, 그중 절반은 중간에 끊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중간에 끊긴 과제를 끝낸 과제보다 두 배 가까이 더 잘 기억했다.

이것을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라고 부른다.

마음은 닫히지 않은 그림을 그냥 두지 못한다. 계속 당기고, 계속 그쪽으로 끌고 간다.

다 못 끝낸 말다툼, 끝내 못 한 말, 아무 설명 없이 끝난 이별. 이런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뒤로 물러나 있다가 전혀 상관없는 순간에 튀어나와 뒤통수를 친다.

시간이 지나면 상대가 무슨 이유를 댔는지, 그날 무슨 옷을 입었는지는 잊는다. 그런데 마음은 무대 맛을 본 배우처럼, 다시 한 번 그 장면을 올릴 기회만 기다린다. 대본은 이미 다 외웠다.

잘하는 것만 연습하니까

연습 연구로 알려진 안데르스 에릭손(Anders Ericsson)은 대부분의 사람이 어느 수준에서 실력이 멈춘다고 했다. 게을러서가 아니다. 이미 할 줄 아는 것만 연습해서다.

익숙한 것을 편하게 되풀이하면 "나 열심히 하고 있다"는 느낌은 든다. 그런데 실력 곡선은 그 자리에서 평평하게 눕는다.

심리학자 로버트 비요크(Robert Bjork)는 배움을 만드는 어려움에 바람직한 어려움(desirable difficulties)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쉽게 되는 연습은 기분만 좋고, 버겁게 되는 연습이 머리에 남는다.

다시 말해 사람이 크는 자리는 정확히 그 사람이 넘어지는 자리다. 잘하는 데서 백 번 하면 익숙해질 뿐이고, 막힌 데서 한 번 하는 게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막히는 자리는 대개 그 사람이 가장 못하는 자리가 아니다. 가장 신경 쓰고, 가장 잘하고 싶고, 그래서 가장 건드리기 무서운 자리다. 거기서 성적이 제일 나쁜데, 마음은 거기에 제일 많이 들어가 있다.

내 선택이 같은 문제를 골라 데려오니까

운명은 걸러진 결과이기도 하다.

이 도시에 남기로 했으면, 다른 도시에서 열렸을 가능성은 걸러져 나간다.

모든 부탁에 좋다고 하기로 했으면, 끝없이 부탁하는 사람들이 걸러져 들어온다.

모든 갈등을 덮고 넘어가기로 했으면, 부딪히고 맞춰 가야만 깊어지는 관계는 걸러져 나간다.

내가 계속 밀어내는 그 문 뒤에는 같은 문제가 서 있다. 매번 다른 옷을 입고.


사주로 보면: 같은 시험이 옷만 바꿔 온다

판을 펴 놓고 보면 이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원국(原局)은 그 사람이 평생 들고 다니는 기초다. 그 안에 다스려지지 않은 글자가 있으면, 그 글자는 사람과 장소를 바꿔 가며 같은 모양의 일을 만든다.

되풀이되는 모양판에 깔린 구조
돈을 빌려주고 못 받는다. 동업이 깨진다. 상대만 바뀐다겁재(劫財)가 무겁고, 정재(正財)와 편재(偏財)가 그 앞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회사를 옮겨도 석 달이면 윗사람과 부딪힌다상관(傷官)이 정관(正官)을 치는 상관견관(傷官見官)
일을 벌이면 늘 감당 못할 만큼 커지고, 결국 접는다정재·편재는 많은데 일간(日干)이 받칠 힘이 없는 재다신약(財多身弱)
하고 싶은 것을 꺼내기 직전에 늘 멈춘다편인(偏印)이 식신(食神)을 치는 효신탈식(梟神奪食)
준비만 하다가 때를 놓친다정인(正印)이 넘쳐 일간이 움직이지 않는 판
늘 쫓기듯 살고, 몸이 먼저 상한다칠살(七殺)이 다스려지지 않은 채 일간을 치는 판
만나는 남자가 바뀌어도 같은 자리에서 흔들린다(여자의 사주)정관과 칠살이 한 판에 섞인 관살혼잡(官殺混雜)

이사를 가면 짐은 버릴 수 있다. 원국은 못 버린다. 새 집에 도착해 보면 이삿짐 트럭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

대운(大運)은 그 기초 위에 십 년씩 다른 계절을 얹는다. 원국의 기초가 무너지기도 하고, 더 단단해지기도 하고, 잠시 다른 모양으로 바뀌기도 한다.

다스려지지 않은 글자를 눌러 주는 글자가 대운으로 들어오면, 같은 문제가 한동안 조용해진다. 다만 해결된 게 아니라 경비원이 생긴 것이다. 대운이 바뀌어 경비원이 퇴근하면, 그 문제는 기다렸다는 듯 돌아온다.

류년(流年)은 해마다 바깥에서 부는 바람이다. 누구나 겪는 힘이라 세다. 그 바람이 원국의 그 자리를 건드리는 해에, 묵혀 둔 문제가 사건이 되어 터진다.

그러니 환경을 바꾸는 것은 시험 장소를 바꾸는 일이다. 시험지는 그대로다.


왜 그 자리에서 넘어가야 하는가

막히면 사람은 대개 환경부터 바꾼다. 도시를 바꾸고, 업종을 바꾸고, 사람을 바꾼다.

그게 다 틀린 건 아니다. 바꿔야 할 때가 분명히 있다. 다만 하나는 먼저 알고 바꾸는 게 좋다. 바뀌는 건 시험장이지, 시험이 아니다.

카프카(Franz Kafka)의 짧은 우화 「법 앞에서(Vor dem Gesetz)」가 있다.

시골 사람 하나가 법의 문 앞에 와서 들여보내 달라고 한다. 문지기는 지금은 안 된다고 한다. 시골 사람은 문 앞에 앉아서 기다린다.

평생을 기다린다. 문지기에게 이것저것 캐묻고, 가진 것을 다 바쳐 뇌물도 주고, 애원도 한다. 나중에는 문지기 털옷 깃에 붙은 벼룩까지 알아보게 되어, 벼룩에게도 문지기를 좀 설득해 달라고 부탁한다.

늙어서 눈이 침침해질 무렵, 그는 한 번도 묻지 않았던 것을 묻는다.

"모두가 법을 찾아오는데, 어째서 이 오랜 세월 동안 나 말고는 아무도 들어가겠다고 온 사람이 없습니까?"

문지기가 그의 귀에 대고 말한다.

"이 문은 오직 당신만을 위한 문이었소. 이제 나는 가서 이 문을 닫겠소."

남의 막힌 자리는 내 것이 아니고, 내 막힌 자리는 남이 대신 지나가 줄 수 없다.


신경과학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2000년 카림 네이더(Karim Nader), 글렌 샤페(Glenn Schafe), 조지프 르두(Joseph LeDoux)는 쥐 실험으로 기억의 재공고화(reconsolidation)를 보여 주었다.

기억은 다시 떠올리는 순간, 원래 모습 그대로 창고에 돌아가지 않는다. 몇 시간 정도 흔들리는 상태, 고쳐 쓸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그 사이에 예상과 다른 경험이 들어오면 그 기억은 다시 쓰인다.

상처는 건드릴 때만 고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떤 일을 만 번 "마음 정리했다"고 해도 소용이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마음 정리는 말을 바꾼다. 몸에 새겨진 느낌은 안 바꾼다.

정말 바뀌는 건 그 장면 안에 다시 서 봤는데, 끝이 다르게 나는 걸 겪을 때다.


내 막힌 자리를 찾는 다섯 가지 방법

1. 감정 일기를 쓰되, 이유는 쓰지 않는다

두 주 동안, 하루에 감정이 가장 세게 올라온 순간 세 번을 적는다. 형식은 세 줄이다.

무슨 일이 있었나. 행동만 적는다.

처음 올라온 감정은 무엇이었나. 화, 부끄러움, 억울함, 도망치고 싶음, 비위를 맞추고 싶음, 당장 해명하고 싶음 같은 것들.

그래서 나는 무엇을 했나. 무슨 말을 했는지, 무엇을 피했는지.

분석하지 않는다. 결론도 내리지 않는다. 막힌 자리는 감정을 못 숨기지만, 분석부터 하면 모양이 흐려진다.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같은 세 줄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고 있는 게 보인다.

2. 지난 일을 복기한다

지난 삼 년, 혹은 더 오래전부터 크게 시달렸던 일들을 적는다. 그리고 하나씩 묻는다. 이 일을 한 번만 겪었나?

아니라면, 같은 종류의 일들을 한 줄로 세운다. 적는 건 셋뿐이다. 상황, 내 행동, 결말.

특히 겉보기에 전혀 다른 일들이 줄을 세워 보니 같은 뼈대를 하고 있다면, 그게 내 문제의 원형이다.

3. 미움과 부끄러움을 세어 본다

살면서 가장 크게 미워했던 순간 셋, 가장 크게 부끄러웠던 순간 셋을 적는다.

그리고 각각에 묻는다. 이게 내 안의 어떤 전제를 밟았나?

"그 사람이 그러면 안 됐지"라고 느꼈다면, 그 "안 됐지" 뒤에 어떤 규칙이 있나. 그 규칙은 어디서 왔나. 그 규칙으로 남도 재고, 나도 재고 있지 않나.

가장 미워하는 것은 대개 가장 신경 쓰는 것이다. 가장 부끄러운 것은 대개 가장 들키기 싫은 것이다. 그리고 미워하는 것은 꽤 자주, 내가 감히 원하지 못한 것이다.

4. 말버릇에서 "영원한 결론"을 찾는다

입에서 늘 나오는 문장 가운데 변하지 않는 문장이 있다. 대개 이런 말로 시작한다.

어차피, 원래, 맨날, 한 번도, 아무도, 나 같은 사람은, 세상이란 게.

"어차피 말해 봐야 소용없어."

"그 사람은 원래 그래."

"나 같은 사람은 이런 거 안 맞아."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어."

세상을 설명하는 문장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자기를 설명하는 문장이다.

5. 몸을 본다

막힌 자리가 건드려지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몸은 말보다 정직하다.

하품이 나온다. 갑자기 졸린다. 명치가 조인다. 목이 막힌다. 등이 서늘하다. 괜히 물이 마시고 싶다. 화장실이 가고 싶다. 책상 정리가 하고 싶다. 머리보다 손이 먼저 휴대폰을 집는다. 상체가 뒤로 젖혀진다. "그 전에 하나만 확인하고" 싶어진다.

다만 모든 괴로움이 막힌 자리는 아니다. 붙들고 다룰 만한 막힘은 네 가지를 함께 갖추고 있다.

되풀이된다. 거기에 내 몫의 책임이 있다. 감정이 실려 있다. 바꾸는 것이 거의 나에게만 달려 있다.


자리를 바꾸지 말고, 자세를 바꾼다

처지를 못 바꾸면, 남은 변수는 하나다. 그 처지 안에 서 있는 내 자세다.

한 고비를 세 번은 넘어야 한다.

같은 고비는 보통 세 번, 깊이를 달리해서 넘는다. 처음에는 그런 게 있다는 걸 안다. 두 번째에는 그 일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알아챈다. 세 번째에는 시작되기 전에 미리 본다.

한 번에 깨는 사람은 없다. 한 번에 깼다고 말하는 사람은 있다.

없애려 하지 말고, 내 것으로 만든다.

어떤 막힌 자리는 평생 따라온다. 그래도 괜찮다. 풀리지 않는 문제도 있는 법이고, 사람이 사는 이유가 완벽해지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막힌 자리는 재주를 싼 포장지이기도 하다.

아무 일에나 막히지는 않는다. 막히는 자리는 거의 언제나 내가 신경 쓰는 자리다. 관심 없는 일은 막히지 않는다. 그냥 돌아간다.

그러니 건드리기만 하면 허둥대는 그 영역이, 사실은 내 열정이 묻혀 있는 곳인 경우가 많다. 선뜻 넘어가지 못하는 건, 거기서 내가 정말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게 될까 봐서다.

명리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칠살은 다스려지지 않으면 몸을 치는 글자지만, 식신이 눌러 주는 식신제살(食神制殺)이 되면 큰일을 결단하는 힘이 된다. 상관은 날뛰면 윗사람을 들이받는 글자지만, 정인이 고삐를 쥐는 상관패인(傷官佩印)이 되면 날카로운 재주가 실력으로 바뀐다.

거친 글자일수록 다스려졌을 때 쓰임이 크다. 다만 다스려지는 조건은 흔하지 않다. 그래서 오래 걸린다.

포장지가 유난히 질긴 이유다.


지옥의 바닥에서 몸을 뒤집다

단테(Dante Alighieri)의 『신곡』 지옥편 마지막 곡, 제34곡이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아홉 층의 지옥을 내려와 마침내 맨 밑바닥에 닿는다. 거기에 루치페로가 있다. 거대한 몸이 반쯤 얼음에 갇혀 있고, 얼굴이 셋, 입이 셋인데, 그 세 입이 죄인 셋을 씹고 있다.

지옥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하나다. 그 마왕의 몸에 난 털을 붙잡고, 몸을 따라 아래로 기어 내려가는 것.

단테는 마왕의 털에 몸을 바짝 붙이고 한 칸씩 내려간다. 그는 더 깊은 곳으로 가는 줄 안다. 지옥을 층층이 내려왔고, 지금도 내려가고 있으니까.

어느 지점에서 베르길리우스가 멈춘다. 몸을 돌려 머리와 다리의 방향을 뒤집는다. 그리고 이번에는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단테는 무슨 일인지 모른다. 고개를 들어 보니 마왕의 다리가 위를 향해 있다. 그는 지옥으로 되돌아가는 줄 알고 겁을 먹는다.

베르길리우스가 말한다. 방금 몸을 뒤집은 그 자리에서, 우리는 세상의 중심을 지났다고.

두 사람은 바위 틈을 지나 밖으로 나오고, 다시 밤하늘의 별을 본다. 지옥편은 이 한 줄로 끝난다.

E quindi uscimmo a riveder le stelle.

"그리하여 우리는 밖으로 나와, 다시 별들을 보았다."

도덕경 40장에는 이런 말이 있다.

反者道之動

되돌아가는 것이 도가 움직이는 방식이라는 뜻이다. 끝까지 간 것은 방향을 바꾼다. 가장 깊은 곳이 곧 돌아서는 곳이다.

올라가는 중인지는 미리 알 수 없다. 내려가는 동안에는 그냥 계속 내려갈 뿐이다. 바닥까지 가 봐야, 가장 낮은 곳이 출구였다는 걸 안다.

단테에게는 몸을 뒤집어 줄 베르길리우스가 옆에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털을 혼자 붙잡고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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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答1
  • 익명.·

    저는 직업적인 면에서 이런 일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만 뒀어요. 어차피 현재는 전업주부라 생활적인 면에서는 괜찮은데 직업에서는 항상 뭔가 오래하지 못하게 막히는 느낌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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