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 많은 사람이 먼저 지친다: 장자가 말한 무정(無情)
술만 마시면 소리를 지르는 배우자가 있다. 다음 날 아침이면 미안하다고 한다. 그 말을 믿고 또 넘어간다. 몇 번째인지는 세다가 그만뒀다.
서른 넘은 자식의 카드값을 막아 준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을 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예순 넘은 부모에게 아직도 인정받고 싶다. 전화를 끊고 나면 열 살 때 기분으로 돌아가 있다.
돈을 빌려 간 친구는 갚을 생각이 없다. 그래도 옛정이 있으니 연락을 끊지 못한다.
이 사람들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정이 많은 사람이다.
그리고 대개, 정이 많은 사람이 먼저 지친다.
어릴 때부터 배운다. 가족이 어려우면 도와야 한다. 친구가 무너지면 붙잡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 없는 사람, 의리 없는 사람이 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사회는 이 말로 굴러간다. 정이 없으면 아무도 남의 아이를 봐 주지 않고, 아무도 병문안을 가지 않는다.
문제는 이 말에 끝이 없다는 데 있다.
한 번 도우면 두 번째가 온다. 두 번째를 도우면 그때부터는 의무가 된다. 의무를 한 번 거르면, 그동안 도운 것은 사라지고 거른 것만 남는다.
정은 그렇게 노역이 된다. 품삯 없는 노역이다. 그만두면 욕까지 먹는다.
여기서 사람들은 두 갈래로 간다. 끝까지 버티다 몸이 먼저 무너지거나,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연락을 끊어 버린다.
둘 다 정이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이다. 정이 적은 사람은 애초에 그 지점까지 가지 않는다.
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편 끝에 두 친구의 말다툼이 나온다. 묻는 쪽은 혜자(惠子), 논리로 먹고사는 사람이었다.
"사람은 본래 정이 없는가?"
장자가 그렇다고 하자 혜자가 따진다. 정이 없으면 그걸 어떻게 사람이라 부르느냐.
장자는 도가 생김새를 주고 하늘이 몸을 줬으니 사람이 맞다고 한다. 혜자가 다시 묻는다. 사람이라면서 어떻게 정이 없을 수 있느냐.
장자의 대답은 이렇다.
是非吾所謂情也 吾所謂無情者 言人之不以好惡內傷其身 常因自然而不益生也
그건 내가 말하는 정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무정(無情)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으로 제 몸을 안에서부터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늘 저절로 그러함을 따르고, 삶에 억지로 무언가를 덧붙이지 않는 것이다.
장자가 말한 무정은 차가운 마음과 거리가 멀다. 좋아하는 마음도 있고 싫어하는 마음도 있다. 다만 그 마음이 제 속을 갉아먹게 두지 않는다.
뒤의 구절도 곱씹을 만하다. 삶에 덧붙이지 않는다. 남의 인생에 내 손을 덧붙이지 않고, 내 인생에 남의 짐을 덧붙이지 않는다는 말로도 읽힌다.
혜자는 끝까지 수긍하지 않았다. 장자는 마지막에 이렇게 놀린다.
자네는 정신을 밖으로 내보내고 기운을 닳게 하면서, 나무에 기대 읊조리고 마른 오동나무 책상에 엎드려 졸고 있지 않은가.
밤새 남 걱정을 하다 아침에 책상에서 조는 사람에게 해 줄 말로도 손색이 없다.
장자 지락(至樂)편에는 정성이 지나쳐서 생긴 일이 하나 실려 있다.
바닷새 한 마리가 노나라 교외에 내려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귀한 새가 왔다며 사당으로 모셔 술을 따랐다. 순임금 때의 음악을 연주하고, 소와 양과 돼지를 모두 갖춘 잔칫상을 차렸다.
새는 눈이 어지러워 근심하고 슬퍼했다. 고기 한 점, 술 한 잔 입에 대지 못하고 사흘 만에 죽었다.
此以己養養鳥也 非以鳥養養鳥也
자기를 기르는 방식으로 새를 길렀고, 새를 기르는 방식으로 새를 기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임금은 아까울 게 없었다. 제일 좋은 음악, 제일 좋은 고기, 제일 좋은 자리.
새에게는 그게 다 고문이었다.
자식에게 좋은 학원,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를 골라 주는 부모. 배우자를 사람 한번 만들어 보겠다고 나서는 사람. 친구의 인생 계획을 대신 짜 주는 사람.
다 노나라 임금이다.
임금은 새가 죽은 뒤에도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그만한 정성을 들였는데.
1968년, 미국의 정신과 의사 스티븐 카프먼(Stephen Karpman)은 교류분석(Transactional Analysis) 학회지에 삼각형 하나를 그렸다. 지금은 드라마 삼각형(Drama Triangle)이라고 부른다.
꼭짓점은 셋이다.
| 자리 | 입에 붙은 말 |
|---|---|
| 피해자(Victim) | "나는 어쩔 수가 없어" |
| 구원자(Rescuer) | "내가 해결해 줄게" |
| 박해자(Persecutor) | "다 너 때문이야" |
이 삼각형에서 눈여겨볼 것은 사람이 한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리가 돈다.
구원자는 처음엔 기쁘다.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된다.
그런데 구해 줘도 상대가 바뀌지 않는다. 지친다. 어느 날 입에서 이 말이 나온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그 순간 구원자는 박해자 자리에 서 있다. 조금 더 지나면 "나만 바보였다"며 피해자 자리에 앉는다.
원래 피해자였던 사람은 그사이 박해자 자리로 옮겨 가 있다. "누가 도와 달랬어?"
셋이 오래 돌고 나면 누가 처음 어느 자리에 있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남는 건 돌았다는 피로뿐이다.
카프먼이 이 삼각형을 처음 그릴 때 들여다본 것은 빨간 모자 같은 동화였다. 동화 속 구원자는 한 번 구하고 퇴장한다.
현실의 구원자는 퇴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삼각형이 계속 돈다.
도덕경 다섯째 장은 첫 줄부터 듣기 불편하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짚으로 엮은 개처럼 여긴다.
짚으로 엮은 개는 옛날 제사에 쓰던 물건이다. 제사 동안에는 정성껏 차려 올리고, 끝나면 길에 내놓아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다.
하늘과 땅이 만물을 미워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어느 쪽도 편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비는 부지런한 사람 밭에도, 게으른 사람 밭에도 똑같이 내린다.
도교에서 말하는 하늘의 이치는 인정을 셈하지 않는다. 심은 대로 거두는 일에, 누가 누구의 자식이고 누가 누구의 배우자인지는 끼어들 틈이 없다.
자식은 내 자식이기 전에 한 사람이다. 부모도 그렇고 배우자도 그렇다. 집 안에서 붙는 이름은 집 안에서만 통한다. 하늘 앞에서는 각자 제 이름 하나로 선다.
그걸 잊으면 남의 길에 내 기대를 깔기 시작한다.
기대는 상대에게 보내는 청구서와 비슷하다. 상대는 그런 청구서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받은 적이 없으니 낼 생각도 없다.
독촉하는 쪽만 속이 탄다.
무정을 잘못 알아들으면 그냥 차가운 사람이 된다. 장자가 말한 무정은 그쪽이 아니다.
추려 보면 세 가지쯤 된다.
기대하지 않는다. 상대가 바뀔 거라는 기대를 내려놓는다. 바뀌면 다행이고, 안 바뀌면 원래 그런 사람이다.
대신 짊어지지 않는다. 상대가 넘어진 자리의 뒷수습을 내가 하지 않는다. 넘어진 사람이 일어나는 법은 넘어진 사람이 배운다.
붙잡고 늘어지지 않는다. 같은 문제로 다시 찾아오면 같은 대답을 한다. 처음보다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상대는 아직 흥정할 여지가 있다고 읽는다.
돈 문제라면 옛 어른들 방법이 있다. 빌려주지 말고, 돌려받지 않아도 될 만큼만 준다. 그러면 돈은 잃어도 사람은 잃지 않는다. 운이 좋으면 둘 다 지킨다.
이렇게 하면 옆에서는 냉정하다고 한다. 그 소리는 들어야 한다. 무정의 값이다.
다만 버리는 사람은 떠나고, 놓는 사람은 그 자리에 남는다. 상대가 한참 뒤에 돌아봤을 때 거기 서 있는 쪽은 대개 놓은 사람이다.
해는 한 사람을 위해 뜨지 않는다. 그래서 모두가 볕을 쬔다.
다가오는 사람은 데워 준다. 떠나는 사람은 붙잡지 않고, 그 볕으로 다른 사람을 데운다. 누구의 짐도 대신 지지 않는다.
그런데 늘 거기 있다.
해가 그렇게 오래 버티는 이유는 단순하다. 누구에게도 자기 궤도를 맞춰 달라고 조르지 않는다. 누구의 궤도에도 끌려 들어가지 않는다.
물론 해도 자기 할 일은 한다. 아침마다 뜬다.
남의 집 커튼까지 걷어 주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