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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즙을 바르면 카메라에 안 찍힌다고 믿은 남자: 모르는 줄 모르는 병

sean··읽음 13
레몬즙을 바르면 카메라에 안 찍힌다고 믿은 남자

어느 자리에서든 말이 끊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국제 정세, 금리, 부동산, 남의 집 자식 교육까지. 주제가 바뀌어도 목소리 높이는 그대로다. 모르는 분야가 없어 보인다.

반대로 한 분야에서 수십 년을 버틴 사람은 말끝이 조심스럽다.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만." "그건 제 분야가 아니라서요." 질문을 받으면 대답보다 되묻는 말이 먼저 나온다.

많이 아는 쪽이 머뭇거리고, 덜 아는 쪽이 단호하다.

거꾸로 된 것 같은데, 거꾸로 된 게 아니다. 이 구조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준 사람은 학자가 아니라 은행 강도였다.


레몬즙을 바른 남자

1995년 1월 6일, 미국 피츠버그.

맥아더 휠러(McArthur Wheeler)라는 남자가 공범과 함께 은행 두 곳을 털었다. 총을 들고 들어갔고, 돈을 받아 나왔다.

눈에 띄는 점이 하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스타킹도, 모자도 없었다. 맨얼굴로 창구 앞에 섰고, 감시 카메라는 그 얼굴을 또렷하게 찍었다.

대신 얼굴에 레몬즙을 발랐다.

레몬즙으로 종이에 글씨를 쓰면 마른 뒤 보이지 않는다. 불에 쬐어야 글씨가 드러난다. 어릴 때 한 번쯤 해 보는 놀이다. 휠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종이에서 안 보이면, 얼굴에서도 안 보일 것이다.

이 정도면 웃고 끝날 이야기다. 그런데 휠러는 그냥 믿지 않았다. 확인을 했다.

범행 전에 얼굴에 레몬즙을 바르고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자기 얼굴을 찍었다. 사진이 나왔는데, 얼굴이 없었다.

나중에 형사들은 필름이 불량이었거나, 카메라가 엉뚱한 곳을 향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휠러에게는 그런 가능성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에게 빈 사진은 증거였다. 실험은 성공했고, 그는 투명해졌다.

그해 4월 19일 밤 11시, 피츠버그 지역 뉴스에 감시 카메라에 찍힌 휠러의 얼굴이 나갔다. 제보가 들어왔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경찰이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

경찰이 감시 카메라 사진을 보여 주자 휠러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But I wore the lemon juice."

레몬즙을 발랐는데요, 라는 말이었다.

그는 징역 24년 6개월을 받았다. 레몬즙 한 병 값치고는 비쌌다.


이 사건에서 웃지 않은 사람

이 이야기는 이듬해 세계 연감(The World Almanac)의 토막 기사로 실렸다. 읽은 사람 대부분은 웃고 넘겼다.

코넬대학교의 사회심리학자 데이비드 더닝(David Dunning)은 웃음 대신 질문 하나를 붙잡았다. 휠러는 멍청해서 잡힌 걸까, 아니면 자기가 틀렸다는 걸 알아챌 장치가 없어서 잡힌 걸까.

휠러의 이야기에서 핵심은 레몬즙이 아니라 폴라로이드다. 그는 검증을 했다. 문제는 검증하는 도구가, 믿음만큼이나 엉터리였다는 데 있다.

더닝은 대학원생 저스틴 크루거(Justin Kruger)와 실험을 설계했고, 1999년 논문 「능력이 없으면서 그걸 모르는 사람들(Unskilled and Unaware of It)」을 냈다. 이것이 더닝-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다.

요지는 간단하다. 어떤 일을 잘하는 데 필요한 능력과, 내가 그 일을 잘하는지 판단하는 데 필요한 능력은 같은 능력이다. 시험을 치는 사람과 채점하는 사람이 같은 머리를 쓴다. 그러니 실력이 모자란 사람은 실력만 모자란 게 아니라, 모자란다는 사실을 볼 눈까지 같이 모자란다.

휠러의 머리에서 응시자와 채점자는 한 사람이었다. 채점자는 레몬즙에 만점을 줬다.

덧붙이면 이 논문은 이듬해인 2000년, 엉뚱하지만 생각할 거리를 주는 연구에 주는 이그노벨상(Ig Nobel Prize) 심리학 부문을 받았다. 레몬즙은 결국 학계에서도 상을 탔다.


인터넷에 떠도는 그 그래프

더닝-크루거 효과를 검색하면 거의 반드시 그래프 하나가 따라 나온다.

처음 조금 배운 사람이 자신감 꼭대기로 치솟는다. 이른바 우매함의 봉우리다. 거기서 더 배우면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절망의 계곡이다. 그 뒤로 천천히 실력과 자신감이 함께 오르는 깨달음의 비탈이 이어진다.

그럴듯하다. 강연 자료에도, 회사 교육 슬라이드에도, 자기계발 영상에도 나온다.

그런데 이 그래프는 1999년 논문에 없다.

더닝과 크루거가 보여 준 것은 실력 하위권 사람들이 자기 순위를 크게 부풀려 말하고, 상위권 사람들은 오히려 조금 낮춰 말한다는 결과였다. 봉우리도, 계곡도, 비탈도 그린 적이 없다. 이 곡선은 나중에 누군가 그려서 인터넷에 올렸고, 출처를 확인하지 않은 사람들이 퍼 날랐다.

정리하면 이렇다. 과잉 확신을 설명하는 그래프가, 과잉 확신으로 퍼졌다.

이 그래프를 한 번쯤 공유했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건 없다. 대부분이 그랬다. 그래도 레몬즙보다는 낫다. 적어도 그 그래프로는 감옥에 가지 않는다.


원이 커질수록 둘레도 커진다

오래전부터 전해 오는 비유가 하나 있다.

내가 아는 것을 원으로 그린다고 하자. 원 안쪽이 아는 것이고, 원 바깥이 모르는 것이다. 원의 둘레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맞닿는 경계선이다.

공부를 하면 원이 커진다. 원이 커지면 둘레도 길어진다.

즉 많이 알수록, 모르는 것과 맞닿는 면이 넓어진다.

작은 원 안에 사는 사람은 경계에 부딪힐 일이 별로 없다. 둘레가 짧으니 바깥이 잘 안 보인다. 그래서 세상이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좁은 방은 원래 한눈에 들어온다.

큰 원 안에 사는 사람은 하루에도 몇 번씩 경계에 부딪힌다. 이 문제는 이렇게 알았는데 저 사례에서는 안 맞는다. 이 이론은 여기까지는 설명하는데 저기서부터는 말이 없다. 아는 게 늘어날수록 "글쎄요"가 늘어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명리를 배우는 사람에게도 익숙한 길이다.

십신(十神) 이름을 막 외운 몇 주 동안은 어떤 사주를 봐도 술술 읽힌다. 정재(正財)가 있으니 알뜰하고, 칠살(七殺)이 있으니 성격이 세다. 한 장 보는 데 일 분이면 충분하다.

몇 해가 지나면 같은 사주 한 장 앞에서 한참을 앉아 있게 된다. 월지(月支)가 무엇인지, 그 글자가 제자리를 지키는지, 대운(大運)이 그 바탕을 어디로 끌고 가는지. 보이는 것이 많아질수록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줄어든다.

실력이 떨어진 게 아니다. 원이 커진 것이다.


모르는 줄 아는 것이 으뜸이다

노자는 이 이야기를 한 줄로 끝냈다.

知不知上 不知知病 夫唯病病 是以不病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아는 것이 으뜸이고, 모르면서 안다고 여기는 것이 병이다. 병을 병으로 알아보면, 그래서 병이 되지 않는다.

『도덕경』 71장이다.

이 문장에서 노자가 병이라고 부른 것은 무지가 아니다. 모르는 것은 병이 아니다. 누구나 대부분을 모른다. 병은 모르는 줄 모르는 것이다.

휠러가 걸린 병도 정확히 이것이었다. 그는 빛이 카메라에 어떻게 맺히는지 몰랐다. 그건 큰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도 설명하지 못한다. 큰일은 자기가 그걸 모른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데 있었다.

모른다는 걸 알았다면, 레몬즙 대신 마스크를 샀을 것이다. 물론 그 편이 더 나았을지는 별개의 문제다.


머릿속에 '확실히'를 두지 않는 사람들

그러면 큰 원 안에 사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모르는 게 많다고 아무 결정도 안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결정은 더 잘한다.

18세기 영국에 토머스 베이즈(Thomas Bayes)라는 목사가 있었다. 그가 남긴 확률 계산 원고를 친구 리처드 프라이스(Richard Price)가 정리해 1763년 왕립학회에 발표했다. 베이즈 정리(Bayes' theorem)라고 부르는 생각이 여기서 나왔다.

수식을 빼고 뼈대만 남기면 이렇다.

처음에는 지금까지 아는 것으로 대략의 가능성을 정해 둔다. 새 정보가 들어올 때마다 그 가능성을 조금씩 고친다.

어떤 사업이 잘될지 판단한다고 해 보자.

일어난 일판단
처음, 경험으로 볼 때열에 여섯은 될 것 같다
유리한 정책이 나왔다열에 일곱 이상으로 올린다
핵심 인력이 한 명 나갔다열에 다섯으로 내린다
첫 분기 매출이 예상보다 좋다다시 열에 여섯 쪽으로 올린다

이렇게 판단하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절대'와 '확실히'가 없다. 새 사실이 오면 고친다. 고치는 게 패배가 아니라 원래 하던 일이다.

반대로 한 번 믿으면 그걸로 끝인 사람이 있다. 될 거라고 믿으면 끝까지 되는 쪽이고, 안 될 거라고 믿으면 무슨 소식이 와도 안 되는 쪽이다. 정보는 판단을 바꾸지 못하고, 판단을 꾸미는 장식으로만 쓰인다.

휠러를 베이즈의 눈으로 다시 보면 웃음이 한 겹 더 나온다.

레몬즙을 바르면 투명해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 가능성은 거의 바닥이었어야 한다. 그다음 빈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이 나왔다. 베이즈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내가 투명해졌을 가능성과, 카메라가 엉뚱한 데를 찍었을 가능성 중에 어느 쪽이 더 높은가.

휠러는 그 질문을 건너뛰고 곧장 은행으로 갔다.

사주를 보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원국(原局)이 한 사람의 높낮이의 바탕을 정한다. 대운은 그 바탕을 단단하게 굳히기도 하고, 허물기도 하고, 잠깐 다른 모양으로 바꿔 놓기도 한다. 류년(流年)은 바깥에서 들어오는 가장 센 힘이다. 원국 한 장만 보고 평생을 단정하는 사람은, 폴라로이드 한 장으로 투명 인간이 된 휠러와 하는 일이 같다.


레몬즙은 지금도 마트에서 판다

휠러 사건 이후로 서른 해가 넘게 지났다.

레몬즙을 얼굴에 바르고 은행에 가는 사람은 이제 없다. 대신 레몬즙의 모양이 바뀌었다.

영상 몇 편을 보고 생긴 확신. 단톡방에서 돌던 그래프 한 장. 한 번 맞았던 내 감. 남들이 다 그렇다고 하니까 생긴 믿음.

바르는 순간에는 아무도 그게 레몬즙인 줄 모른다. 폴라로이드를 찍어 보면 늘 얼굴이 안 나오기 때문이다.

오늘 누군가에게 단정적으로 말한 것 하나를 떠올려 보자. 그건 원 안쪽에서 나온 말이었나, 레몬즙이었나.

이 글에 나온 사실도 한 번은 직접 확인해 보시라. 쓴 사람이 레몬즙을 발랐을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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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答1
  • 염화소녀_(구)남궁현자·

    예전 카페에 "trust no one"을 말씀하시던 분이 생각나네요...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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