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를 증명하느라 바쁜 사람: 모임에서 집게를 못 내려놓는 이유
모임에 가면 꼭 한 사람이 있다.
고기 굽는 집게를 처음부터 끝까지 쥐고 있는 사람. 메뉴판을 먼저 펴고, 물병을 먼저 돌리고, 누가 이직 얘기를 꺼내면 이력서를 봐 주겠다고 먼저 나서는 사람.
대화가 이 초만 끊겨도 그는 못 견딘다. 새 화제를 던지고, 누구와 누구를 이어 주고, 분위기가 처진다 싶으면 농담을 하나 꺼낸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센스 있다고 한다. 눈치 빠르고 정 많은 사람이라고.
본인은 집에 가는 길에 녹초가 된다. 왜 지쳤는지는 잘 모른다. 오늘도 잘했는데.
이런 사람은 대개 능력이 있다. 능력이 있으니 쓸 데가 보이고, 쓸 데가 보이면 손이 먼저 나간다. 탈은 손이 멈추지 않는 데서 난다.
빈손으로 앉아 있으면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 기분. 그 기분이 손을 움직인다.
이런 사람은 자기를 통째로 내밀지 않는다. 쓸모별로 잘라서 내민다.
여기, 길 잘 아는 사람 한 조각.
여기, 엑셀 잘하는 사람 한 조각.
여기, 고민 잘 들어 주는 사람 한 조각.
여기, 계산 먼저 하는 사람 한 조각.
조각마다 가격표가 붙어 있다. 이만큼 해 줄 테니 이 자리에 나를 끼워 달라는 가격표.
겉보기엔 배려다. 뜯어보면 보험이다. 쓸모가 있으면 밀려나지 않겠지, 하는 보험.
밑바닥에는 이런 문장이 깔려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는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기를 물건처럼 다룬다. 성능 좋은 물건, 쓸 데 많은 물건. 사람들은 이걸 보고 사회성이 좋다고 하는데, 본인은 그저 성능 시험을 치르는 중이다. 매번, 아무도 시키지 않은 시험을.
이 버릇은 모임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혼자 있을 때도 나온다.
드라마를 보면서 메모를 한다. 대사 중에 써먹을 게 있을까 봐.
영화가 끝나면 오늘 뭘 배웠는지 정리한다.
책은 나한테 도움 되는 책만 읽는다. 소설은 어쩐지 시간 낭비 같다.
주말에 소파에 누워 있으면 죄짓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눕더라도 팟캐스트를 튼다. 자기계발 팟캐스트를.
경제학에는 인적 자본(human capital)이라는 말이 있다. 교육과 훈련에 들인 돈과 시간을 기계에 들인 투자처럼 보고, 사람을 생산 요소의 하나로 셈하는 시각이다. 1960년대에 시어도어 슐츠(Theodore Schultz)와 게리 베커(Gary Becker)가 다듬었다.
나라 경제를 설명할 때는 쓸 만한 틀이다. 곤란한 건 이 틀을 자기 머릿속에 들여놓고 사는 사람이다.
기계는 쉬면 손해다. 감가상각은 돌아가는데 생산이 멈췄으니까. 이 셈법을 자기에게 들이대면 낮잠은 손실이고, 멍때리기는 가동 중단이고, 재미로 하는 일은 낭비가 된다.
그러다 보면 노는 것까지 실적이 되어야 한다. 여행을 가면 기록을 남기고, 운동을 하면 기록을 재고, 취미를 시작하면 자격증부터 알아본다.
놀이에 성과표를 붙이는 순간 그건 놀이가 아니다. 야근이다. 수당도 안 나오는 야근.
1973년, 경제학자 마이클 스펜스(Michael Spence)가 「구직 시장의 신호(Job Market Signaling)」라는 논문을 냈다.
고용주는 지원자의 실력을 직접 볼 수 없다. 그래서 학위처럼 얻기 비싼 표시를 보고 실력을 짐작한다. 스펜스는 이 신호 이론(signaling theory)으로 2001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요점은 이렇다. 서로 아는 것이 다른 곳에서, 자기를 증명할 길이 없는 쪽은 비싼 신호를 쏜다. 비쌀수록 믿어 주니까.
쓸모를 증명하느라 바쁜 사람이 하는 일이 정확히 이것이다.
| 하는 일 | 드는 비용 |
|---|---|
| 모임에서 먼저 계산대로 간다 | 돈 |
| 대화에서 해결책을 먼저 내놓는다 | 머리 |
| 관계에서 남의 감정을 먼저 받아 준다 | 기운 |
셋 다 비싼 신호다.
그런데 이 신호를 받는 쪽은 그를 의심한 적이 없다. 의심하는 사람은 본인 하나다.
아무도 내지 않은 시험에 혼자 응시하고, 혼자 채점하고, 혼자 낙제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음 모임에서 재시험을 치른다.
영국의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콧(Donald Winnicott)은 1960년 논문에서 거짓자기(false self)라는 개념을 내놓았다.
아이가 제 느낌대로 울고 웃을 때 받아 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이는 주변이 원하는 모습에 자기를 맞추기 시작한다. 말 잘 듣고, 눈치 빠르고, 손 안 가는 아이가 된다.
위니콧은 이렇게 남의 요구에 맞춰 덧씌운 껍데기를 거짓자기라 불렀다. 그 안쪽에 숨어 버린 본래의 느낌이 참자기(true self)다.
어른들은 이런 아이를 두고 일찍 철들었다고 칭찬한다. 칭찬받으니 더 철이 든다.
그 아이가 자라서, 모임에서 집게를 놓지 못하는 어른이 된다.
거짓자기는 쓸모가 많다. 일 잘하고, 실수 적고, 남을 잘 챙긴다. 딱 한 가지를 못 한다. 그냥 있는 것.
침묵이 무서워서 먼저 말을 꺼낸다. 실망시킬까 봐 거절을 못 한다.
쓸모를 내보이는 건 결국 숨는 방법이다. 기능 뒤에 서 있으면 사람이 안 보인다. 쓰이는 건 견딜 만한데, 들여다보이는 건 못 견딘다.
차라리 소모품이 되는 쪽을 고른다. 들키는 것보다는 그게 덜 무섭다.
장자 인간세 편에 목수 이야기가 나온다.
장석이라는 목수가 제나라로 가다가, 곡원이라는 마을에서 사당 앞에 선 거대한 상수리나무를 본다. 소 수천 마리를 가릴 만큼 크고, 구경꾼이 장터처럼 몰려 있다.
장석은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간다.
제자가 묻는다. 이렇게 좋은 재목은 처음 봅니다. 어째서 거들떠보지도 않으십니까.
장석이 답한다. 쓸모없는 나무다.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짜면 금방 썩고, 그릇을 만들면 깨지고, 문을 달면 진이 흐르고, 기둥을 세우면 벌레가 먹는다. 쓸 데가 없으니 이렇게 오래 산 것이다.
그날 밤, 나무가 장석의 꿈에 나타난다. 그리고 과일나무들 이야기를 꺼낸다. 열매가 익으면 따이고, 따일 때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찢긴다.
此以其能苦其生者也 故不終其天年而中道夭
제 재주 때문에 제 삶을 괴롭히는 것들이다. 그래서 타고난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중간에 꺾인다.
나무는 한마디를 더 보탠다.
且也若與予也皆物也 奈何哉其相物也
너나 나나 다 같은 물건인데, 어찌 서로를 물건으로 따지는가.
이천삼백 년 전 나무가 목수에게 한 말인데, 지금 들어도 귀가 따갑다.
남이 나를 쓸모로 재는 건 그래도 피할 데가 있다. 그 사람 곁을 떠나면 된다. 내가 나를 쓸모로 재면 피할 데가 없다. 목수와 나무가 한 몸이니까.
인간세 편은 이렇게 끝난다.
桂可食 故伐之 漆可用 故割之 人皆知有用之用 而莫知無用之用也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어서 베이고, 옻나무는 쓸 데가 있어서 껍질이 갈린다. 사람들은 쓸모 있는 것의 쓸모는 다 알아도, 쓸모없는 것의 쓸모는 모른다.
공구는 닳는다. 공구함 주인은 닳은 공구를 고쳐 쓰지 않는다. 새로 산다.
쓸모로 자리를 산 사람은 쓸모가 떨어지는 날 자리를 잃는다. 그런데 더 아픈 건 바깥 자리가 아니다.
자기 값을 통째로 남의 필요에 묶어 두었으니, 필요가 사라지면 자기도 같이 사라진다. 쓸모없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 문장이 머릿속에서 돌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쉬는 날이 더 괴롭다.
명리에서 일간(日干)이 기운을 바깥으로 내보내는 글자는 둘이다. 식신(食神)과 상관(傷官). 같이 내보내도 내보내는 모양이 다르다.
식신(食神): 먹여야 마음이 놓인다
식신은 차려 내는 글자다. 음식을 내고, 재주를 내고, 손을 보탠다.
식신이 강한 사람에게 모임의 집게는 짐이 아니다. 고기 굽는 게 즐겁다. 남이 맛있게 먹는 걸 보면 배가 부르다.
즐거워서 하는 동안은 아무 문제 없다. 즐거움이 의무로 바뀌는 날이 문제다.
오늘은 그냥 앉아 있고 싶은데 손이 집게로 간다. 안 구우면 누가 한마디 할 것 같다. 그날부터 식신은 차려 내는 글자에서 바치는 글자로 바뀐다.
상관(傷官): 증명해야 마음이 놓인다
상관은 드러내는 글자다. 아는 것을 말하고, 남이 못 본 것을 짚고, 더 나은 방법을 내놓는다.
상관이 강한 사람은 침묵을 비워 두지 못한다. 누가 고민을 꺼내면 맞장구보다 해결책이 먼저 나온다.
상대가 원한 건 "많이 힘들었겠다" 한마디였다. 이쪽은 그사이 대안 세 가지를 정리해서 우선순위까지 매겨 놓았다.
모임에서 분석을 펼치고, 그림을 그리고, 다음 계획까지 짜 주는 사람. 쓸모를 증명하는 데 가장 날이 선 글자가 상관이다.
정인(正印): 해낸 것 없이 받는 자리
정인은 일간을 낳는 글자다. 일간이 무엇을 해내서 받는 게 아니다. 일간이니까 받는다. 성적표를 안 보고 밥을 주는 자리다.
식신과 상관은 내보내는 글자라, 내보내기만 하면 마른다. 다시 채우는 쪽이 인(印)이다.
특히 상관이 쉬지 않고 날을 세울 때, 그 날을 거두어 쓸모 있는 칼로 다듬는 글자가 정인이다. 명리에서 상관패인(傷官佩印)이라 부르는 구조다.
내놓는 힘은 넘치는데 받는 자리가 비어 있는 판은, 증명하는 일로 그 빈자리를 메우려 든다. 받는 법을 모르니 버는 법으로 채운다. 그래서 늘 바쁘고, 늘 허기진다.
방법이라 부르기도 민망하다. 다 아는 얘기다. 그래도 적어 둔다.
빈손으로 들어간다.
모임에 갈 때 꺼낼 화제를 미리 챙기지 않는다. 남의 고민에 해결책부터 내밀지 않는다. 대화가 끊기면 끊긴 대로 둔다.
침묵 십 초에 세상은 안 무너진다. 무너지는 건 이쪽 불안뿐이다.
계속 뭔가를 내놓아야만 끼워 주는 자리라면, 애초에 내 자리가 아니었다.
못 한다고 말한다.
"그건 제가 못 해요."
"저는 그거 잘 몰라요."
"요즘 좀 지쳤어요."
입에서 잘 안 떨어지는 말들이다. 이 말을 꺼내면 사람이 두 갈래로 갈린다. 나를 쓰려던 사람은 슬그머니 멀어지고, 나를 보던 사람은 남는다.
거절 한마디가 체가 된다. 걸러지는 쪽이 누구인지 보는 것만으로도 꽤 공부가 된다.
성적표를 안쪽으로 옮긴다.
오늘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쓸모 있게 봤는지는 묻지 않는다. 오늘 내 느낌대로 지냈는지, 넘어오는 선을 막았는지를 묻는다.
채점자가 바뀌면 시험 과목도 바뀐다.
칸트는 1785년 『도덕형이상학 정초』에 이렇게 적었다.
너 자신의 인격에서든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든,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단지 수단으로만 대하지 않도록 행위하라.
자주 인용되는 문장인데, 인용될 때 앞부분이 곧잘 잘려 나간다. 너 자신의 인격에서든.
칸트는 남 얘기만 한 게 아니었다.
다음 모임에서 집게를 내려놓아 본다.
고기는 탄다. 누군가 "어, 타요!" 하고 외친다. 다른 누군가가 집게를 집어 든다.
그걸로 끝이다. 아무도 당신을 내보내지 않는다. 고기 좀 태웠다고 사람 쫓아내는 모임은 없다.
어려운 건 고기가 타들어 가는 그 삼십 초를 견디는 일이다. 대부분은 이십 초쯤에서 집게를 도로 집는다.
곡원의 상수리나무는 그동안에도 아무것도 안 하고 서 있다. 구경꾼은 여전히 장터처럼 몰려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