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은 곱하기다: 곳간의 쥐와 뒷간의 쥐
"노력하면 된다."
초등학교 교실 뒤 게시판에 붙어 있던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절반만 맞을 뿐이다.
나머지 절반은 아무도 붙여 주지 않았다. 붙였다면 교실 분위기가 꽤 어두워졌을 것이다.
어릴때는 세상을 모르기에 행복한 것
그러나, 그 어릴때의 인지를 가지고 자라버리면,,,곤란하다.
공사장에서 하루에 벽돌 수천 장을 나르는 사람이 있다. 해 질 녘이면 허리가 펴지지 않는다. 이보다 더 열심히 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벽돌을 날라서 큰 부자가 된 사람은 들어 본 적이 없다.
게을러서가 아니다. 벽돌 나르기라는 일에는 천장이 낮게 붙어 있다. 하루는 스물네 시간이고, 사람의 허리는 하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천장에 머리가 닿는다.
반대로 펀드 하나를 굴리는 사람, 회사 하나를 꾸리는 사람의 하루도 스물네 시간이다. 그런데 그 하루가 만들어 내는 값은 벽돌 나르는 하루의 수천 배, 수만 배가 된다. 더 부지런해서가 아니다. 그 사람의 능력에 지렛대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노력은 더하기로 셈하면 안 된다. 곱하기로 셈해야 한다.
| 능력 | 노력 | 결과 |
|---|---|---|
| 0 | 100 | 0 |
| 1 | 100 | 100 |
| 10 | 50 | 500 |
능력이 0이면 노력을 백으로 올려도 0이다. 0에 무엇을 곱해도 0이라는 것은 초등학교에서 이미 배웠다. 게시판 바로 옆에서.
이 곱셈을 평생 붙들고 산 사람이 있다. 교세라(Kyocera)를 세운 이나모리 가즈오(稲盛和夫)다.
그가 내놓은 식은 이렇다.
인생과 일의 결과 = 사고방식 × 열의 × 능력
열의와 능력은 0에서 100까지다. 그런데 사고방식만은 마이너스 100에서 플러스 100까지로 잡았다.
이 한 줄이 무섭다.
방향이 틀린 사람은 열의가 클수록, 능력이 뛰어날수록 결과가 더 큰 마이너스가 된다. 영하 백에 열의 백을 곱하면, 대단히 성실한 재앙이 나온다.
이나모리는 2010년, 일흔여덟의 나이에 파산한 일본항공(JAL)의 회장 자리를 무보수로 맡았다. 그리고 2년 7개월 만에 다시 증시에 올려놓았다. 직원들이 갑자기 더 부지런해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 충분히 부지런했다. 바뀐 것은 곱셈의 첫 칸이었다.
엉뚱한 방향으로 하는 노력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가만히 있으면 0이다. 0은 적어도 마이너스보다는 크다.
많은 사람이 묻는다. 이렇게 애쓰는데 왜 사는 게 이 모양인가.
대답은 짧다. 그 애씀이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국부론』에서 물과 다이아몬드를 나란히 놓았다. 물보다 쓸모 있는 것은 없는데 물로는 거의 아무것도 살 수 없다. 다이아몬드는 쓸모가 거의 없는데 그것 하나로 엄청난 물건을 바꿀 수 있다. 이것이 경제학에서 말하는 가치의 역설(paradox of value)이다.
성실함은 물이다. 없으면 아무것도 안 돌아가는데, 값은 거의 매겨지지 않는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 거리를 쓰는 사람은 누구보다 부지런하다. 그러나 그 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줄을 서 있다. 오늘 그만두면 내일 다른 사람이 빗자루를 든다. 수요와 공급 앞에서, 그 부지런함은 값을 받지 못한다.
세상이 사람을 고르는 기준은 "얼마나 쏟았느냐"가 아니다. "누가 대신할 수 있느냐"다.
남이 못 하는 것을 할 줄 알고, 남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땀에 값이 붙는다. 최고 수준의 반도체 설계자, 손꼽히는 외과 의사의 노력이 비싼 것은 그 노력 뒤에 드문 능력이 서 있어서다.
성실함은 이력서에 적는 순간 모두의 것이 된다. 모두가 적기 때문이다.
노력은 값을 만든다. 그런데 그 값을 나누는 것은 노력이 아니다.
케이크를 구운 사람과 케이크를 자르는 사람은 대개 다른 사람이다. 칼을 쥔 쪽은 권력이고, 제도이고, 독점이다.
『명사(明史)』의 마황후 열전에 이런 일이 적혀 있다. 오흥의 큰 부자 심수(沈秀), 흔히 심만삼(沈萬三)으로 알려진 사람이 명나라 도읍 남경의 성벽 삼분의 일을 제 돈으로 쌓았다. 그것으로 모자라 황제의 군대에 상까지 내리겠다고 나섰다.
주원장의 대답은 이랬다.
匹夫犒天子軍,亂民也,宜誅
필부가 천자의 군대에 상을 내리겠다니, 이는 난민이다. 죽여 마땅하다.
마황후가 말려서 목숨은 건졌다. 그 말린 말이 더 서늘하다.
民富敵國,民自不祥
백성이 나라와 맞먹을 만큼 부유하다면, 그 자체가 이미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심수는 운남으로 귀양을 갔다. 평생 쌓은 부지런함이 황제의 한 문장을 넘지 못했다.
지금은 칼을 휘두르는 방식이 점잖아졌을 뿐이다. 온라인 가게를 아무리 정성껏 꾸려도 플랫폼이 검색 순서를 한 번 바꾸면 손님이 끊긴다. 영상을 아무리 공들여 만들어도 노출이 한 번 막히면 그만이다. 칼자루는 여전히 다른 사람 손에 있다.
옛말에 작은 부자는 부지런함이 만들고, 큰 부자는 하늘이 낸다고 했다. 요즘 사람들은 여기에 한 줄을 더 붙인다. 아주 큰 부자는 자리를 잡는다.
밭을 열심히 갈면 배를 채운다. 땅 한 필지를 잡으면 세를 받는다. 면허 하나를 잡으면 누워서도 들어온다. 법을 어기라는 말이 아니다. 드물고, 막혀 있고, 제도가 지켜 주는 자리가 어디 있는지 보라는 말이다.
『사기(史記)』 이사열전(李斯列傳)은 쥐 이야기로 시작한다.
젊은 이사는 초나라 시골 관청의 말단 관리였다. 어느 날 관청 뒷간에 사는 쥐를 보았다. 더러운 것을 먹고, 사람이나 개가 다가오면 놀라 달아나기 바빴다.
그다음 곳간에 들어가 그곳 쥐를 보았다. 쌓인 곡식을 먹으며 큰 지붕 아래 살고, 사람도 개도 걱정하지 않았다.
이사가 탄식했다.
人之賢不肖譬如鼠矣,在所自處耳
사람이 잘나고 못난 것은 쥐와 같다. 스스로 어디에 자리를 잡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두 쥐는 똑같이 부지런했을 것이다. 뒷간 쥐가 더 바빴을 가능성도 크다. 늘 쫓겨 다녔으니까.
노력의 뜻은 노력하는 자리에서 정해진다.
바닥에서의 노력은 값싼 일손이 된다. 가운데에서의 노력은 올라가는 사다리가 된다. 꼭대기에서의 노력은 남이 못 올라오게 쌓는 성벽이 된다. 똑같은 땀인데 쓰임이 셋이다.
옛날 문벌 귀족은 배움과 벼슬길과 땅을 함께 쥐고 있었다. 지금은 이름 있는 학교의 자리, 핵심 직책, 돈이 흐르는 길목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모양은 바뀌었는데 속은 그대로다. 칼을 쥔 사람이 규칙을 만들고, 규칙은 칼을 쥔 사람을 지킨다.
이사는 짐을 쌌다. 순자(荀子) 밑에서 공부하고 진나라로 건너가 마침내 승상이 되었다. 뒷간에서 곳간까지, 그 이동 자체가 그의 노력이었다.
그러면 노력을 그만두라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아무렇게나 하는 노력을 그만두라는 말이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소를 잡는 백정 포정(庖丁)이 나온다. 그는 임금 앞에서 칼을 놀리며 이렇게 말한다.
良庖歲更刀,割也;族庖月更刀,折也。今臣之刀十九年矣,所解數千牛矣,而刀刃若新發於硎
솜씨 좋은 백정은 해마다 칼을 바꾼다. 살을 베기 때문이다. 보통 백정은 달마다 칼을 바꾼다. 뼈를 내리치기 때문이다. 제 칼은 열아홉 해 동안 소 수천 마리를 잡았는데도 숫돌에서 막 갈아 나온 것 같다.
달마다 칼을 바꾸는 백정이 게으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제일 힘을 많이 쓴다. 뼈를 내리치는 일은 땀이 많이 난다.
포정은 소의 몸에 난 큰 틈을 치고, 빈 곳으로 칼을 이끈다고 했다.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 전체만 보였는데, 삼 년이 지나자 소 한 마리가 통째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뼈와 살 사이의 빈틈만 보였다는 뜻이다.
여기서 노력의 쓸 곳 세 군데가 나온다.
첫째, 보는 데 쓰는 노력. 일을 더 하는 것보다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는 데 시간을 쓰는 것이다. 보고서 한 장을 더 쓰는 한 시간보다, 윗사람이 왜 그 사람을 끌어올렸는지 따져 보는 한 시간이 더 비쌀 때가 많다. 포정의 삼 년이 이것이다.
둘째, 드문 것을 쌓는 노력.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백 번 되풀이하는 대신, 남이 못 하는 것을 하나 만드는 쪽에 땀을 쓰는 것이다. 열아홉 해 무뎌지지 않은 칼은 포정에게만 있었다.
셋째, 칼자루 쪽으로 다가가는 노력. 나눠 받는 사람에서 나누는 사람 쪽으로 한 걸음이라도 옮기는 것이다. 시킨 일만 하는 사람에서 정하는 사람 쪽으로, 시간을 파는 사람에서 시간을 사는 사람 쪽으로.
같은 회사에서 같이 일을 시작한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한 사람은 묵묵히 제 일만 한다. 다른 한 사람은 제 일을 하면서 사장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손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업계가 어디로 가는지를 같이 본다. 십 년 뒤 한 사람은 같은 책상에 앉아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동업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다.
두 번째 사람이 더 부지런했던 것이 아니다. 뼈가 아니라 틈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이사 이야기에는 뒷부분이 있다.
진시황이 죽고 이세 황제가 들어서자, 환관 조고(趙高)의 모함으로 이사는 옥에 갇혔다. 기원전 208년, 함양 저잣거리에서 허리가 잘리는 형을 받았고 삼족이 멸해졌다.
형장으로 끌려 나가며 그는 둘째 아들을 돌아보고 이렇게 말했다.
吾欲與若復牽黃犬俱出上蔡東門逐狡兔,豈可得乎
너와 함께 다시 누렁이를 끌고 상채 동문 밖으로 나가 토끼를 쫓고 싶은데, 이제 그럴 수 있겠느냐.
뒷간 쥐를 보고 곳간을 꿈꾼 사람이, 곳간 맨 안쪽까지 들어갔다가 마지막에 떠올린 것은 곳간이 아니었다. 고향 동문 밖의 들판이었다.
이사보다 백 년쯤 앞서 장자(莊子)에게도 초나라 왕의 사신이 찾아왔다. 나랏일을 맡아 달라는 청이었다. 장자는 낚싯대를 쥔 채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초나라에 죽은 지 삼천 년 된 신령한 거북이 있어, 왕이 비단에 싸서 사당 높은 곳에 모셔 두었다고 들었다. 그 거북은 죽어서 뼈로 귀하게 모셔지기를 바랐겠는가,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기를 바랐겠는가.
사신들이 살아서 진흙에 꼬리를 끌고 싶었을 것이라고 답하자, 장자가 말했다.
往矣!吾將曳尾於塗中
돌아가시오. 나는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겠소.
그래서 노력은 뜻이 있는가.
있다. 노력하지 않으면 곳간이든 들판이든 문 앞까지도 못 간다. 노력은 입장권이다.
다만 보증서는 아니다. 그리고 입장권 어디에도 어느 문으로 들어가는 표인지는 적혀 있지 않다.
이사는 곳간을 골랐고, 장자는 진흙을 골랐다. 두 사람 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지금 당신이 애쓰고 있는 그 자리는 뒷간인가, 곳간인가, 아니면 진흙인가.
그리고 그걸 알게 되는 것은, 대개 칼이 열아홉 해쯤 지난 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