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을 존중해.” 그런데 왜 네 방식대로 해야 하지?
친구들과 여행을 가기로 했다.
단체방이 생겼다.
한 사람이 일정표를 올렸다.
오전 7:01 출발.
11시12분 점심.
11:12-12:48 이동
12:48-13:00 표구매
오후 13:04 관광 시장
15:21 카페 휴식
다른 사람이 묻는다.
“여행 가서도 출근해?”
"너 지금 대통령 일정 짜니?"
일정표를 만든 사람이 답한다.
“그럼 아무 계획 없이 가자고? 내가 분단위까지 계산할려고, 맵에서 도보로 걸으면 얼마, 차로 가면 얼마, 막히면 얼마, 주차장 어느 자리에서 매표소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다 측정한거!!!”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
벌써 돌아오고 싶다.
누군가 분위기를 풀려고 말한다.
“얘들아, 사람은 다른 거지 틀린 게 아니야.”
좋은 말이다. 다들 맨날 하는 말이지...
그러고는 덧붙인다.
“그래도 여행은 좀 자유롭게 다녀야지.”
다름은 존중한다.
일단 자기 방식에 동의한 다음부터.
우리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말을 알지만, 상대가 무엇을 중요하게 보고 있는지는 모를 때가 많다.
계획을 세운 사람은 친구들을 통제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예약을 놓치고, 길에서 시간을 버리고, 밥 먹을 곳을 못 찾아 다투는 일이 싫었을 수도 있다.
자유롭게 가자는 사람은 무책임한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평일 내내 시간에 맞춰 살았으니, 여행에서는 마음에 드는 골목에 조금 오래 머물고 싶었을 수도 있다.
혹은 대장이 직통이라서, 식사후, 간식후 화장실을 가야할수도 있다.
한쪽은 계획이 있어야 편하다.
다른 쪽은 계획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편하다.
둘 다 편하게 놀러 가고 싶다.
편안함을 만드는 방법이 다르다.
우리는 같은 단어를 다른 의미로 쓰고 있다.
편하게 가자면서?
그래서 편하게 가자는 회의를 3시간 한다.
명리학을 배우는 재미와 쓸모가 여기에 있다.
“저 사람은 왜 저래?”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갈 말을 얻는다.
같은 상황에서 무엇을 먼저 보고, 무엇이 있어야 안심하며, 무엇을 빼앗겼다고 느끼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관성의 기준과 책임이 앞서는 사람은 역할과 순서를 먼저 확인할 수 있다.
숙소는 누가 예약하지?
운전은 누가 하지?
몇 시까지 모이기로 한 거지?
이 사람에게 “가서 알아서 하자”는 말은 자유보다 미정인 업무로 들릴 수 있다.
특히 지난 여행에서도 그 ‘알아서’를 자기가 전부 알아서 했다면 더 그렇다.
이게 편해? 불편한 것이다.
반면 식상의 표현과 즐거움이 앞서는 사람은 현장에서 생기는 재미를 본다.
저 골목에 들어가 보고 싶다.
맛있어 보이는 가게가 있다.
사진을 조금 더 찍고 싶다.
이 사람에게 10분 단위 일정은 알찬 여행이 아니라 관광지 순회 근무표일 수 있다.
카페에 앉았는데, 사진도 못 찍고, 메뉴도 다 못 먹고, SNS에 올릴 사진 수정도 못했는데, 다음 장소로 이동하라고 한다.
커피보다 내가 먼저 테이크아웃된다.
재성의 현실적인 판단이 앞서면 또 다른 것이 보인다.
이 숙소는 가격에 비해 괜찮은가.
이동하는 데 돈과 시간이 얼마나 드는가.
다 같이 쓰는 비용은 어떻게 나눌 것인가.
이게 안되면 맘이 안 편한데,,
옆에서는 말한다.
“놀러 와서까지 돈 계산이야?”
그런데 여행이 끝난 뒤 정산할 때는 모두 그 사람을 찾는다.
계산적이라고 했던 사람에게 가장 정확한 계산을 부탁한다.
인성의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작용이 앞서면 사람의 사정이 먼저 들어올 수 있다.
쟤는 요즘 많이 피곤하다던데.
처음 오는 곳이라 불안할 수도 있겠다.
조금 쉬었다 가면 안 될까.
짐도 내가 들어줘야 할까?
왜 안색이 안좋지, 어디 아픈가?
여기 안 좋아하나? 다른곳으로 갈까?
그 배려 덕분에 여행이 편해질 수도 있다.
반대로 모두의 사정을 받아주다가 아무것도 정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한 사람은 배고프고, 한 사람은 안 고프고, 한 사람은 조금 있다 먹고 싶다.
이해는 충분히 했다.
아무도 결정을 안내리면,
점심은 오후 4시에 먹는다.
비겁의 자기 기준과 나란히 서려는 마음이 앞서면 결정에 참여하는 일이 중요할 수 있다.
왜 네가 다 정했어?
내 의견은 안 물어봐?
같이 가는 여행이잖아.
목적지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아닐 수 있다.
내 의견이 없어도 되는 사람처럼 취급받은 것이 불편한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목적지 설명만 더 열심히 한다.
“여기 리뷰가 얼마나 좋은데.”
리뷰가 3천 개여도 내 의견 한 개가 빠진 것은 그대로다.
같은 말다툼처럼 보여도, 누군가는 시간을 지키려 하고, 누군가는 즐거움을, 누군가는 비용을, 누군가는 배려를, 누군가는 자기 결정권을 지키려 한다.
이 차이를 모르면 상대의 행동을 내 기준으로 번역한다.
계획을 세우면 피곤한 사람.
계획을 바꾸면 무책임한 사람.
돈을 물으면 쪼잔한 사람.
사정을 들어주면 우유부단한 사람.
의견을 내면 고집 센 사람.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는 좋은 이름을 붙이고.
상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는 성격 결함을 붙인다.
그 다음에 다름은 틀림이 아니란 문장을 붙인다.
나는 꼼꼼하다.
너는 집착한다.
나는 자유롭다.
너는 대책이 없다.
이렇게 번역하면 세상에 정상적인 사람은 나 하나 남는다.
그 한 명도 다른 사람 단톡방에서는 평가가 별로 좋지 않을 것이다.
십신을 배우면 이런 번역을 잠깐 멈출 수 있다.
내게 당연한 우선순위가 상대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너는 정관이라 그래”, “쟤는 겁재라 어쩔 수 없어”로 끝내면 이름표만 바꾼 것이다. 이렇게 사용하면, 사람들이 기겁하고, 명리학 욕한다. 이래서 내가 사주 보는것 싫어해. 특히 안 좋은 이야기에 명찰 붙여 주면,,,
한 사람 안에서도 여러 작용이 함께 움직이고, 명식의 조건과 상황에 따라 드러나는 모습이 달라진다.
평소에는 즉흥적인 사람도 자신이 운전과 예약을 모두 맡으면 시간에 예민해질 수 있다.
일정에 엄격한 사람도 누군가 믿고 맡길 사람이 있으면 느긋해질 수 있다.
명리를 배웠다면 질문이 더 구체적이어야 한다. 물론 당장은 생각이 안날수 있다.
“너는 시간 낭비하는 게 걱정되는 거야?”
“일정을 바꿀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지?”
“예산을 먼저 정하면 좀 편하겠어?”
“네 의견을 안 물어서 기분이 나빴던 거야?”
상대를 설명할 말이 생겼다면, 상대에게 확인할 말도 생겨야 한다.
그렇다고 다르다는 이유로 모든 행동을 받아줄 필요는 없다.
자유롭게 다니고 싶은 것과 약속 시간마다 남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다르다.
기준을 세우는 것과 다른 사람을 모욕하며 따르게 하는 것도 다르다.
왜 그러는지 이해하면서도, 그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부담은 조정할 수 있다.
여행 단톡방에서 다시 이야기를 나눈다.
예약한 식사 시간만 지키고, 오후에는 자유 시간을 두기로 한다.
예산도 정한다.
꼭 가고 싶은 곳은 각자 하나씩 고른다.
누군가 말한다.
“이렇게 하니까 되네. 역시 다름을 인정해야 해.”
일정표를 만들던 사람이 새 파일을 올린다.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자유 시간.
자유 시간에 뭘 할지는 전날까지 제출해 주세요.
누가 이야기 한다.
"자유인데, 왜 제출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