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했는데, 왜 아직 안 웃어?
퇴근하고 들어왔더니 식탁에 배달 용기가 그대로 있다.
아침에 돌려놓은 빨래도 세탁기 안에 있다.
배우자는 게임 중이다.
헤드셋 너머로 목소리가 들린다.
“내가 한다니까!”
" 내버려 둬!" 동시에 게임속 동료를 욕한다
집안일에도 저 정도 의욕이면 좋겠다.
배달 용기를 치우다가 한숨이 나왔다.
그제야 헤드셋을 벗는다.
“아, 미안. 깜빡했어.”
"내가 치운다고 했는데, 왜 니가 치워?"
그런데,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이제야 알아차렸는지,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어본다.
피곤하고 짜증이 난다고 했다.
대답이 바로 온다.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사과를 받았다. 안 받으면, 속 좁아 보일까봐 받은게 아니라,
피곤하고 지쳤는데, 싸울 힘이 없어서 받았다.
이제 바로 깨끗하게 감정 털어내고, 웃어야 하는 모양이다.
사과에 표정 변경 요청까지 포함된 줄은 몰랐다.
잘못을 인정하는 말과, 상대에게 당장 기분을 풀라고 요구하는 말은 다르다.
사과를 듣고 마음이 풀릴 수 있다.
그래도 몸은 여전히 피곤할 수 있다.
같은 일이 반복됐다면 서운함이 더 오래 남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 시간이 잘 허용되지 않는다.
“그럼 내가 뭘 더 해야 하는데?”
“계속 그렇게 있을 거야?”
“나도 오늘 힘들었어.”
"힘들어서 게임 좀 해서 스트레스 푸는것도 안돼?"
"왜 사람 눈치를 줘?"
처음에는 안 치운 배달 용기 이야기였다.
어느새 누가 더 힘들게 사는지 경연이 시작됐다.
야근이 나온다.
상사가 나온다.
출퇴근길 정체가 나온다.
지난달 반차내고 장모님(시어머니) 모시고 병원 간 일도 특별 출연한다.
결국 먼저 지친 사람이 말한다. 그게 남자일수도 있고, 여자일수도 있다.
“알겠어. 내가 예민했어.”
상대는 그제야 편안해진다.
대화가 잘 끝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쪽은 사과를 받으려던 것도 아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사과를 하고 있다.
명리에서 인성은 상대의 사정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작용으로 읽어볼 수 있다.
내가 미안하다고 말했어도, 저 사람의 피곤함은 아직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반대로 관살의 통제 작용이 상대의 감정에까지 향하면, 표정도 정리해야 할 대상이 된다.
사과는 했고.
설명도 했고.
그러니 이제 정상적으로 행동하라는 것이다.
이 사람의 머리속에는 사과와 동시에, 리셋이란 규정이 있다.
여기서 정상은 대체로 본인이 편한 상태다.
집에 들어와 쉬고 싶은 사람에게, 웃는 얼굴로 정상 영업부터 하라고 한다.
물론 위로하는 데 서툰 사람도 있다.
상대가 조용하면 자신에게 화가 난 것으로 받아들이고, 뭘 해야 할지 몰라 조급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자기는 자기가 조급해진 것을 화난 것으로 이해하고, 그 것을 상대에게 터트리기도 한다.
그런데 서툴다는 설명만으로 매번 같은 장면을 넘길 수는 없다.
“잠깐 쉬고 싶어”라는 말을 듣고 기다리는지.
아니면 쉬는 동안에도 “아직 화났어?”를 48번 물어보는지 봐야 한다.
기분을 풀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진행 상황을 계속 보고해야 한다.
분노 게이지 70% 도달 했어
니가 침묵해서
현재 45% 야,
니가
방금 또 물어서 90% 까지 올라왔다.
이렇게 알려주면 편하려나?
상대의 감정을 전부 해결할 수는 없어도, 회복을 재촉하다 일을 늘리지는 않을 수 있다.
누군가 우울한 표정이라고 반드시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니다.
당장 기분을 바꾸지 못했다고 내 사과가 무효가 된 것도 아니다.
그 사람에게 오늘 하루가 남아 있는 것일 수 있다.
반대로 힘들다는 이유로 모욕하고 소리 지르는 것까지 받아줘야 하는 것도 아니다.
기분이 안 좋을 수 있다는 것과, 그 기분으로 상대를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것은 다르다.
분노하고 화나는것은 이해하는데, 그 풀이의 대상이 왜 나여야 하지?
말할 수 있다.
“오늘 많이 지쳤어. 조금 쉬고 이야기하고 싶어.”
듣는 쪽도 말할 수 있다.
“알겠어. 나도 잠깐 쉬었다가 이야기하자.”
그사이 배달 용기를 치울 수도 있다.
왜 아직 웃지 않는지 분석하는 것보다, 눈앞의 쓰레기를 버리는 편이 도움이 될 때가 많다.
그날도 배우자가 묻는다.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는데?”
소파에 앉아 대답한다.
“빨래 좀 널어줘. 나는 잠깐 앉아 있을게.”
“그러면 기분 풀 거야?”
또 조건이 붙는다.
빨래를 널면 웃음으로 결제해야 한다.
뭐 인생은 거래라지만, 웃음값이 싸면,,,, 그거 헤프다고 하는데 말이지
빨래부터 널어주면 안 될까.
내 표정은 조금 구겨져 있어도 되잖아.
구김살 없어야 하는 것은 얼굴의 주름, 빨래.... 그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