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뭐 하고 지내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묻는다.
“요즘 뭐 하고 지내?”
잠깐 생각한다.
출근하고.
장 보고.
빨래하고.
밀린 일 좀 하고.
“똑같지 뭐.”
말하고 나니 자기 생활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누구는 이직했다.
누구는 하이닉스 사서 큰 돈 벌었다.
누구는 사업을 시작했다.
누구는 운동해서 몸이 달라졌다.
누구는 12살 연하랑 사귄다고 한다.
나는 지난주에 세탁기 배수 필터를 청소했다.
고생은 했는데 근황으로 발표하기에는 좀 그렇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다.
부모님 병원에 다녀왔다.
미뤄뒀던 일을 마쳤다.
피곤한 날에도 먹을 것을 챙겼다.
몇 번은 정말 다 놓고 싶었지만, 필요한 연락은 했다.
새로 이룬 것이 없다는 것과, 자기 생활을 지탱한 일이 없다는 것은 다르다.
살다 보면 앞으로 나가는 일보다 무너지지 않게 돌보는 일이 많은 시기가 있다.
돈이 들어오면 밀린 곳으로 나간다.
하나를 처리하면 다른 일이 생긴다.
주말에 쉬려고 했는데, 평일에 못 한 일을 하다가 월요일이 온다.
달력은 잘 넘어간다.
나만 같은 자리에 있는 것 같다.
이때 사람을 더 지치게 하는 말이 있다.
“그래서 그 시간을 통해 뭘 배웠어?”
반드시 뭘 배워야 하나? 포기를 배웠다. 누워서 쇼츠 보기를 배운건 안되나?
그달을 보내는 데도 가진 힘을 거의 다 썼는데.
고생을 했으면 성장했다는 증빙까지 내야 하는 모양이다.
하늘은 뭐 큰 임무를 주려고 고생 시킨다고 하는데,
얼마나 큰 인간 만들려고 개고생을 시키는지?
명리에서 대운과 류년을 살피는 것도 모든 시기에 같은 성과를 요구하지 않기 위해서다.
원국에 어떤 재주가 있어도, 운에서 그것을 쓰기 편한 조건이 마련되는 때와 다른 부담부터 처리해야 하는 때가 다를 수 있다.
펼칠 때가 있고.
정리할 때가 있고.
이미 가진 것을 지키는 데 힘이 필요한 때도 있다.
그래서 확장하기 어려운 시기에 규모가 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무능하다고 평가하면 놓치는 것이 생긴다.
그동안 무엇을 감당했는지는 계산에서 빠진다.
그렇다고 힘든 운에는 무조건 참고 있으라는 뜻도 아니다.
버티는 동안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 무엇을 계속 잃고 있는지는 봐야 한다.
잠시 시간이 필요한 일을 견디는 것과, 같은 피해가 반복되는데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것은 다르다.
부담을 줄이거나 도움을 구하는 것도 버티는 방법이다.
그만둘 일을 그만두어야 남은 생활을 지킬 수도 있다.
이를 악무는 것만 인내는 아니다.
이를 계속 악물고 있으면 밥 먹기도 힘들다.
이빨 나가서 돈 들어간다.
또 어떤 일은 오늘 더 고민한다고 빨리 끝나지 않는다.
상대의 답을 기다려야 한다.
정해진 과정을 지나야 한다.
이미 할 수 있는 것은 했는데 마음만 계속 앞서간다.
마음이 앞서 갈수록, 마음속 문제는 커진다.
그럴 때는 문제를 잠깐 두고 밥을 먹어도 된다.
입맛은 없을 수 있다.
그럼 더 맛있는 것을 먹으면 된다.
해결되기 전까지 자기 생활 전체를 중단할 필요는 없다.
걱정을 쉬었다고 그 일을 가볍게 여긴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 흐른다고 모든 일이 좋아지지는 않는다.
손해로 남는 것도 있다. 고통 스러운 기억으로 남기도 한다.
끝내 이해하지 못한 일도 있다.
그래도 그 일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날이 생길 수 있다.
하루 종일 붙들고 있던 생각을 저녁에야 떠올리는 날도 온다.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는데, 그것만 생각하며 살지는 않게 되는 것이다.
친구와 헤어진 뒤 집에 와서 빨래를 넌다.
세탁기에서 물이 잘 빠진다.
지난주에 고생한 보람은 있다.
내일 입을 옷도 꺼내놓는다.
그리고 변기를 청소한다.
대단히 의욕적인 밤은 아니다.
인생이 곧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도 없다.
그래도 내일 아침에 찾느라 허둥댈 일 하나는 줄였다.
밖에서 보면 “똑같지 뭐”인 생활이다.
그 안에서는 누군가 매일 조금씩 손을 써서, 그 똑같은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게 인생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