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은 왜 시키지도 않았는데 또 하고 있을까
주말마다 빵을 굽는 사람이 있다.
처음 만든 빵은 단단했다.
겉만 단단한 것이 아니었다.
속까지 한결같았다.
벽돌로 써도 될만큼, 네모 반듯하고 단단했다.
3층 건물도 올릴수 있을 것 같았다.
아주 정직한 빵이다.
어디를 먹어도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다.
치과를 가봐야 할 것 같은데
가족들이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냥 사 먹으면 안 돼?”
만든 사람도 맛없는 것은 안다.
치아 경도 테스트 인것도 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신이 나 있다.
발효 시간이 짧았나.
반죽할 때 물이 부족했나.
다음에는 온도를 조금 바꿔볼까.
가족은 빵을 먹음 당했고, 이 사람은 문제를 발견했다.
그래서 다음 주에도 굽는다.
실패했는데 왜 또 하냐고 물으면 대답이 간단하다.
“이번에는 좀 다르게 해보려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자격증 시험도 아니다.
이걸 팔 계획도 아직 없다...
그냥 궁금한 것이다.
이런 사람을 옆에서 보면 가끔 이상한 기분이 든다.
누군가는 계획표를 붙여놓고도 미루는 일을, 저 사람은 주말 아침부터 앞치마를 두르고 하고 있다.
알람도 필요 없다.
오히려 가족들이 조금 늦게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반죽기 소리에 다 깼다.
우리는 꾸준히 하는 사람을 보면 의지력이 강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맞을 때도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계속 참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음에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다시 하는 중이다.
겉으로는 똑같이 시간을 쓴다.
하지만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다르다.
한 사람은 오늘 할 분량을 끝내려고 한다.
다른 사람은 한 번만 더 확인하고 끝내려고 한다.
그 ‘한 번만 더’가 길다.
게임할 때는 다들 잘 안다.
마지막 한 판이 세 번쯤 남아 있다.
그런데 자기가 하는 일에서도 그런 순간을 만나는 사람이 있다.
그림의 색을 조금 바꿔본다.
기계의 움직임을 다시 맞춰본다.
이 문장은 왜 읽을 때 걸리는지 소리 내어 읽어본다.
남이 보면 아직도 붙잡고 있냐고 한다.
본인은 이제 재미있는 부분에 들어왔다.
오래 붙들고 있는 힘이 꼭 괴로움을 참는 데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즐거운 얼굴로 하는 노력을 조금 덜 진지하게 본다는 점이다.
인상을 쓰고 있어야 열심히 하는 것 같다.
고통을 참는 모습에서, 그래 저러니까 성공하지, 난 저런 고통 못 참으니까, 그래야 위안이 된다.
잠을 줄였다고 해야 각오가 느껴진다.
재미있다고 하면 취미 수준인 것 같다.
재미로하는데 성공했다고 하면, 배신 당한 느낌이고, 내가 무능한 느낌이 드니까
“그냥 재미로 하는 거예요.”
겸손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래 했는지 확인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몇 년째다. 십수년째다
안 시켜도 찾아봤다.
실패한 것도 수천 번이다.
본인은 노는 동안 쌓였는데, 옆에서는 이제 시작하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고도, 3일 뒤에 나가떨어진다.
그러니 즐기는 사람을 이기기 어렵다는 말에는 이런 면이 있다.
즐거우면 무조건 천재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다시 돌아올 이유가 일 안에 있다는 것이다.
보상이 없으면 멈추는 사람과, 결과가 궁금해서 다시 만져보는 사람은 반복하는 횟수부터 달라질 수 있다.
명리에서 식신(食神)과 상관(傷官)이 삶의 즐거움, 자연스러운 생산과 연결해 읽는 이유도 여기에 닿아 있다.
식상은 일간이 생하는 기운이다.
자기 힘을 밖으로 꺼내 무언가를 만들고, 그 과정과 결과를 누리는 쪽이다.
식신이 제 역할을 하면 만들어내는 일이 자기 만족과 이어질 수 있다.
잘됐다고 누가 칭찬하기 전에도, 본인이 달라진 것을 알아본다.
지난번보다 부드럽다.
원하던 모양에 가까워졌다.
전에 안 되던 것이 된다.
이런 재미는 작지만 다시 손을 움직이게 한다.
게다가 이 식상은 호기심을 준다는 거다. 차이점을 발견하는 힘이 강한데, 그 차이가 무엇을 만들지가 궁금한거다.
식상이 강한 분들은 특징이 있다. 전에 먹었던 맛있는것 보다는 개맛 없을지라도 새로운 것을 먹어보고 싶다.
리센느 빵이 5종류가 나오면, 내 취향과 관계없이 5종을 다사서 맛본다. 배가 터져도
그런데 식상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누구나 편하게 살고 취미로 성공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 식신을 낼 힘은 있는가.
흐름이 막히지는 않는가.
다른 글자와 만나 무슨 일을 하는가.
이것까지 봐야 한다.
식신제살(食神制殺)도 생각해볼 수 있다.
칠살이라는 압박과 어려움을 식신의 생산과 해결 능력으로 다루는 구조다.
조건이 맞아 그 작용이 살아 있다면, 어렵다는 이유로 물러서기보다 어떻게 풀지를 찾는 힘으로 읽을 수 있다. 오히려 어려움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희열과 쾌감을 느끼는 변태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식신과 칠살 두 글자가 있다고 다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제어가 필요한지, 제어할 힘이 있는지가 맞아야 한다.
여기서 생활에 가져와 볼 부분은 이것이다.
같은 문제를 만나도 어떤 사람은 자기 능력에 대한 판정으로 받고, 어떤 사람은 고쳐볼 대상으로 받는다.
빵이 딱딱하게 나왔다.
한 사람은 생각한다.
나는 이런 것도 못 하는구나.
역시 손재주가 없다.
괜히 재료만 샀다.
나는 이쪽 길이 아닌가봐. 앞으론 사먹어야지.
다른 사람은 빵을 잘라본다.
왜 가운데가 이렇게 됐지?
오븐에서 나온 것은 빵 하나인데, 첫 번째 사람은 자기 인생까지 같이 꺼내서 평가하고 있다.
그러면 다음 반죽이 무거워진다.
이번에도 안 되면 나는 진짜 못 하는 사람이 되니까.
그런데 두 번째 사람에게는 다음 반죽에서 확인할 것이 남아 있다.
실패가 안 아픈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실패를 어디까지 확대하느냐가 다른 것이다.
물론 먹고사는 일이 걸려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일까지 납품해야 하는 빵이 딱딱하면, 재미있는 발견이라고 웃고 있을 수만은 없다.
손님은 발견을 주문하지 않았다.
먹을 것을 주문했다.
그래서 모든 일을 놀이처럼 하라는 말은 현실에서 조심해서 써야 한다. 사실 이건 타고나는것에 가깝다. 엄숙주의자들에게는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형태다. 왜냐면, 이런 사람들은 실패를 과정으로 본다. 실패도 하나의 놀이다. 엄숙주의자들은 실패는 있어서는 안되고, 패배인 것.
생계가 걸린 사람에게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고 하는 것은 쉽다.
마음을 편하게 먹어도 나갈 돈은 정확한 날짜에 나간다.
놀듯이 하는 사람의 여유 뒤에는 실패를 감당할 조건이 있을 수도 있다.
시간이 있다.
다시 살 재료비가 있다.
이번 결과로 생활 전체가 흔들리지는 않는다.
그 조건까지 같이 봐야 한다.
그런데 반대로, 모든 시도에 처음부터 생활 전체를 걸어놓는 사람도 있다.
취미로 빵을 굽기 시작했다.
사진을 올렸더니 반응이 좋다.
누군가 말한다.
“이거 팔아도 되겠는데?”
갑자기 생각이 많아진다.
가격을 얼마로 하지?
상호는 뭘로 하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팔지?
아직 제일 맛있었던 빵을 다시 똑같이 만드는 것도 어렵다.
그런데 포장 상자는 이미 보고 있다.
재미있던 일이 순식간에 사업 가능성 심사에 들어간다.
명리의 식신생재(食神生財)도 무조건 낭만적으로 볼 일은 아니다.
만드는 힘이 현실의 수요와 만나 재로 이어지면 좋다.
다만 자기가 좋아서 만드는 것과, 약속한 품질을 정해진 시간에 반복해서 내놓는 것은 요구하는 조건이 다르다.
이게 식상이 너무 강해도 문제고, 너무 약해도 문제다.
식상과 재의 비중, 식신, 상관과 정재, 편재의 조합이 다 조금씩 다르다. 강좌글이 아니니 여기까지
재를 얻기 시작하면 그 재에 연결된 책임도 살펴야 한다.
수량.
납기.
원가.
상대의 요구.
잘 풀리면 생산이 수입으로 이어진다.
반대로 감당할 조건보다 일을 크게 벌이면, 좋아하던 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쫓길 수 있다.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면 행복하다는 말에는 중간 과정이 꽤 많이 빠져 있다.
재미로 세 개 만들던 사람이 주문 서른 개를 받았다.
열 개쯤 만들었을 때는 재미있다.
스무 개부터는 왜 그 댓글에 답했는지 생각한다.
그러니 즐거운 것을 발견했다고 바로 전부 돈으로 바꿀 필요는 없다.
돈으로 이어갈 생각이라면, 그때는 다른 준비도 해야 한다.
취미의 재미를 지키는 선택과 사업으로 키우는 선택은 둘 다 가능하다.
어느 쪽이 더 훌륭한 인생인지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또 놀듯이 한다고 아무렇게나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남이 보기에는 쓸데없는 차이까지 확인하는 사람이 있다.
반죽 상태를 적어둔다.
구운 시간을 비교한다.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지루한 부분도 있다.
청소는 귀찮다.
베이킹을 사랑한다고 설거지까지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다음 결과가 궁금해서 그 귀찮은 부분도 처리한다.
좋아하는 일은 매 순간 즐겁다는 뜻이 아니다.
다소 귀찮아도 다시 해보고 싶은 것이 남는다는 쪽에 가깝다.
이 차이를 알면 자기에게 맞는 일을 찾는 질문도 조금 바뀐다.
나는 무엇을 할 때 늘 행복한가?
이 질문은 대답이 어렵다.
늘 행복한 일은 생각보다 적다.
누워 있는 것도 오래 하면 허리가 불편하다.
사실 뭘해도 그게 일이면 안 행복한 사람도 존재한다.
그러면
대신 이런 것을 볼 수 있다.
어디에서 막혔을 때 자꾸 다시 생각나는가.
조금 나아진 것을 알아보면 혼자 기분이 좋아지는가.
남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다음번에 바꿔볼 것이 있는가.
그런 일이 있다면, 당장 쓸모 없다고 치우지는 않아도 된다.
취미로 가져가면 어떤가? 늙어서 취미있는 삶과 없는 삶은 차이가 크다.
우리는 쓸모를 너무 빨리 묻는다.
이걸 해서 뭐 하게?
돈이 돼?
지금 그럴 시간이 있어?
이 질문도 필요한 때가 있다.
그런데 모든 관심이 입구에서 수익 심사를 받아야 하면, 충분히 해보기 전에 사라지는 것도 많다.
한 번쯤은 결과의 크기보다, 내가 이 일을 계속 만져보고 싶은지 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
일에서도 작은 여지는 만들 수 있다.
전부 바꿀 수는 없어도, 반복해서 불편했던 순서를 하나 바꿔본다.
항상 쓰던 방식 외에 다른 방법을 비교해본다.
결과를 망치지 않을 범위에서 시험해본다.
내 인생을 걸지 않아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런데 작은 변화에도 반드시 큰 성과가 나와야 한다고 요구하면, 시도는 다시 무거워진다.
누가 칼들고 옆에서, 실패하면 죽는다고 하면, 시도 자체를 안하는게 최선의 선택 아니던가?
재미있게 해보자고 해놓고 결과가 약하면 화를 낸다.
“그래서 뭐가 남았는데?”
그렇게 물을 거였으면 처음부터 시험이라고 하지 말지.
놀이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성적표가 받아서 나온다.
게다가 성적표 주기전엔 말 안했던, 낮은 성적 벌칙이 있더라!!!
처음의 빵 굽는 사람은 다음 주에 다시 반죽을 한다.
가족은 살짝 긴장한다.
이번에는 빵이 조금 부드럽다.
가족이 한 조각 더 먹는다.
만든 사람은 그걸 본다.
“지난번보다 낫지?”
괜찮다고 한다.
그러자 벌써 다음 이야기를 시작한다.
“다음에는 겉을 조금 더 바삭하게 해보려고.”
가족은 이제 그만 바꿔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먹을 만하다.
그런데 본인은 이미 다음번이 궁금하다.
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실패하면 안 된다는 각오가 아니다.
지난번과 조금 달라진 것을 직접 보았고,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런 힘이 오래간다. 설사 그게 타고 난거라도,
이를 악물지 않았다고 덜 노력한 것은 아니다.
이를 악물 일은, 지난번 빵 먹을 때 이미 충분히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