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닿지 않는 곳에 생각도 닿지 않는다
sean··읽음 26
말이 닿지 않는 곳에 생각도 닿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 이런 말을 남겼다.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뜻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말을 그냥 지나친다. 생각이 먼저고, 말은 그걸 담는 그릇이라고 여기니까. 머릿속에 떠오른 걸 입 밖으로 꺼내는 게 언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반대다.
말이 없으면 생각이 멈춘다.
지금 당장 해 볼 수 있다. 화가 나는데 정확히 뭐가 화나는지를 말로 못 잡겠을 때가 있다. 그냥 "짜증 나"로 끝난다. 누군가가 "그건 분노야, 아니면 서운함이야?"라고 물으면 그제야 생각이 갈라진다. 아, 나는 화가 난 게 아니라 서운했구나. 그 단어를 만나는 순간, 감정이 비로소 윤곽을 가진다.
단어가 없었으면 그 감정은 뭉뚱그려진 채로 가라앉는다. 느끼긴 했는데 뭘 느꼈는지 모르는 상태. 그게 반복되면 자기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된다.
언어는 도구가 아니다. 생각의 통로다.
명리학(命理學)에서도 이 구조가 보인다.
사주에서 식신(食神)과 상관(傷官)은 일간(日干)이 밖으로 내보내는 에너지다. 생각을 말로 꺼내고, 느낀 것을 표현으로 바꾸는 기능이 여기에 있다.
식상(食傷)이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안의 것을 밖으로 꺼내는 통로가 열려 있다. 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글이 되고, 글이 행동이 된다. 흐름이 끊기지 않는다.
반대로 식상(食傷)이 눌려 있으면 어떻게 되나. 안에서는 뭔가가 들끓는데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느끼는데 말을 못 하고, 생각은 있는데 정리가 안 된다. 답답함이 쌓이는데 그 답답함이 뭔지조차 말로 못 잡는다.
인성(印星)이 식상(食傷)을 누르는 구조가 대표적이다. 인성(印星)은 배움이고 흡수다. 들어오는 것은 많은데 나가는 것이 막혀 있다. 책은 많이 읽었는데 자기 말이 없는 사람. 머릿속에는 가득한데 한 줄도 못 쓰는 사람. 이건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내보내는 통로가 좁아서 벌어지는 일이다.
결국 식상(食傷)은 단순히 '말을 잘한다'가 아니다. 생각을 완성하는 마지막 한 걸음이다. 말로 꺼내야 비로소 생각이 마무리되고, 마무리된 생각만이 다음 생각으로 이어진다.
호주 북부에 쿡 타요르(Kuuk Thaayorre)라는 원주민 공동체가 있다. 이 사람들의 언어에는 '왼쪽'이나 '오른쪽'이라는 말이 없다.
그 대신 모든 방향을 동서남북으로 말한다. "컵이 네 남남서쪽에 있다." "오른손 들어"가 아니라 "동쪽 손 들어."
인지과학자 레라 보로딧스키(Lera Boroditsky)가 이 사람들을 연구했다. 결과가 놀라웠다. 쿡 타요르 사람들은 건물 안에 있든, 낯선 도시에 가든, 자기가 어느 방향을 보고 있는지를 언제나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내장된 나침반이 있는 것처럼.
보로딧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이건 유전자가 아니라 언어가 만든 능력이라고. 매 순간 동서남북으로 말해야 하니까, 뇌가 방위를 항상 켜 두는 거다. 말이 습관을 만들고, 습관이 뇌의 배선을 바꾼다.
그 사람들에게 왼쪽과 오른쪽이라는 단어가 없는 게 아니다. 그 개념 자체가 필요 없는 거다. 언어가 다르면 뇌가 세상을 읽는 방식 자체가 달라진다.
색깔도 마찬가지다.
영어에는 파란색이 하나다. blue. 하늘도 blue, 바다도 blue, 남색도 blue.
러시아어에는 파란색이 두 개다. 연한 파랑은 голубой(goluboy), 짙은 파랑은 синий(siniy). 이건 서로 다른 뉘앙스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색이다. 러시아어를 쓰는 사람에게 연한 파랑과 짙은 파랑은 빨강과 주황만큼이나 다르다.
2007년,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실린 연구가 이걸 실험으로 증명했다. 러시아어 화자와 영어 화자에게 파란색 계열 색상을 보여 주고 구분하게 했다. 결과는 선명했다. 러시아어를 쓰는 사람들이 파란색 구분에서 영어 화자보다 빨랐다. 특히 siniy와 goluboy의 경계를 넘는 색 조합에서 차이가 두드러졌다.
단어가 두 개이면, 눈도 두 개로 나눠서 본다. 단어가 하나이면, 눈도 하나로 뭉뚱그려서 본다.
이건 색맹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같은 눈을 가지고도 언어가 다르면 보이는 세상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더 극단적인 사례가 있다.
아마존 유역에 피라하(Pirahã)라는 부족이 산다. 언어학자 대니얼 에버렛(Daniel Everett)이 수십 년간 이 부족과 생활하며 연구한 결과, 피라하어에는 숫자가 없다.
하나, 둘, 셋이 없다. '조금'과 '많이' 정도만 있다.
연구자들이 피라하 사람들 앞에 견과류를 놓고 똑같은 수만큼 꺼내 보라고 했다. 서너 개까지는 됐다. 그런데 수가 늘어나면 정확한 대응이 무너졌다. 여덟 개를 보고 여섯 개를 꺼내거나 열 개를 꺼냈다.
이 사람들이 바보여서가 아니다. 정글에서 살아남으려면 관찰력, 기억력, 판단력이 어중간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정확한 수'를 가리키는 단어가 없으니, 뇌에서 정확한 수를 붙잡아 놓을 고리가 없는 거다.
숫자라는 말이 없으면, 세는 행위 자체가 불안정해진다.
명리학(命理學)도 같은 구조 위에 서 있다.
사주를 배우기 전과 후,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배우기 전에는 사람을 볼 때 '성격 좋다, 나쁘다' 두 가지가 전부다. 그런데 십신(十神)이라는 열 개의 개념이 들어오면 세상이 달라진다. 저 사람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왜 저런 선택을 하는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비겁(比劫)이 강한 사람의 고집과, 인성(印星)이 강한 사람의 고집은 다르다. 식신(食神)이 하는 배려와, 정재(正財)가 하는 배려도 다르다. 이 단어들이 없으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 이 단어들이 있으면, 사람 사이의 수십 가지 차이가 보인다.
피라하 사람들이 숫자 없이 셈을 못 하듯이, 십신(十神) 없이 사람을 읽으면 뭉뚱그려진 인상만 남는다.
재성(財星)이라는 개념이 없으면 돈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가 안 보인다. 관살(官殺)이라는 개념이 없으면 권력과 책임의 차이가 안 보인다. 개념이 있어야 차이가 보이고, 차이가 보여야 판단이 정밀해진다.
명리학(命理學)을 배운다는 건 사람을 읽는 언어를 하나 더 장착하는 거다. 그 언어가 장착되는 순간, 같은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까지 읽으면 좀 멀리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다. 원주민, 아마존 부족, 명리학. 전문 영역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이건 지금 이 자리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직장에서 상사한테 미묘한 불쾌감을 느꼈는데, 그걸 말로 잡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기분이 나빠요"까지만 가고 멈춘다. 왜 나쁜지, 정확히 어떤 지점이 나를 건드렸는지를 말로 풀 수 없으면, 생각도 거기서 멈춘다. 그러면 대응도 멈춘다. 그냥 참거나, 아니면 그냥 폭발하거나. 이 두 가지밖에 안 남는다.
반대로, "그건 업무 지시가 아니라 인격 평가였어요"라고 한 문장으로 잡아낼 수 있는 사람은 상황이 달라진다. 감정이 분류되면 다음 수가 보인다. 대응의 선택지가 열린다.
사람들은 이걸 성격 차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참을성이 있고, 어떤 사람은 화를 잘 내고. 그런데 많은 경우, 성격이 아니라 언어의 차이다. 감정을 세분화해서 잡아낼 단어가 있는 사람과, 그 단어가 없어서 뭉뚱그려진 채로 사는 사람의 차이.
투자도 같은 구조다.
"이 종목 좋아 보여"라는 말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 왜 좋은지, 어떤 조건에서 좋은 건지, 리스크는 뭔지. 그걸 말로 나눌 수 없으면 판단이 아니라 느낌으로 사는 거다.
"밸류에이션(valuation) 대비 성장성이 저평가됐고, 현금흐름이 안정적이지만 규제 리스크가 있다."
이 한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과, "뭔가 괜찮아 보이는데"에 머무는 사람은 같은 차트를 보고 있어도 다른 세계에 산다. 판단의 정밀도가 다르다. 실수를 잡아내는 속도가 다르다.
개념이 없으면 분석이 안 된다. 분석이 안 되면 판단이 감에 기댄다. 감에 기대면 시장이 그 대가를 걷어 간다.
이건 반대 방향으로도 작동한다.
쓸데없는 단어를 많이 아는 게 아니라, 생각의 칼날이 될 수 있는 개념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다.
경제학에서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이라는 개념을 모르는 사람은 "싸니까 사자"에서 생각이 끝난다. 이 개념을 아는 사람은 "이걸 사면 다른 뭘 못 하게 되지?"까지 생각이 간다. 한 단어가 생각의 경로를 하나 더 만들어 주는 거다.
심리학에서 '매몰 비용(sunk cost)'을 아는 사람은 "이미 이만큼 넣었으니까"라는 함정이 보인다. 이 말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함정이 함정으로 안 보인다. 그냥 당연한 논리처럼 느껴진다.
개념 하나를 익히는 건, 뇌에 새 통로를 하나 뚫는 거다.
인성(印星)이 하는 일이 이거다. 새로운 개념을 흡수하고, 그 개념이 뇌의 지도를 넓힌다. 그런데 인성(印星)만으로는 절반이다. 흡수한 것을 자기 말로 꺼내야 그 개념이 진짜 내 것이 된다. 그게 식상(食傷)이 하는 일이다.
인성(印星)으로 들어와서 식상(食傷)으로 나간다. 이 흐름이 돌아가는 사람은 배울수록 말이 정밀해지고, 말이 정밀해질수록 생각이 깊어진다. 흐름이 막힌 사람은 많이 읽어도 자기 말이 안 늘고, 자기 말이 안 느니까 생각도 제자리다.
그러면 이건 타고나는 건가.
아니다.
언어의 경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읽고, 배우고, 생각하면 늘어난다.
다만 방향이 있다. 아무 글이나 많이 읽는다고 언어가 느는 게 아니다. 자기 생각을 한 번이라도 글로 써 보는 사람이 빨리 는다. 읽기는 남의 언어를 빌려 오는 거고, 쓰기는 자기 언어를 만드는 거다.
대화도 마찬가지다. 수준 높은 대화를 자주 하는 사람은, 자기 생각을 다듬는 기회가 많다. 상대의 언어가 내 언어에 길을 내 준다.
반대로, 짧은 영상과 짧은 댓글만 오가는 세상에 오래 있으면 언어가 줄어든다. 줄어든 언어만큼 생각도 줄어든다. 본인은 모른다. 줄어든 걸 인지하려면 그걸 인지할 언어가 있어야 하니까.
비트겐슈타인이 그 한 문장을 남긴 게 1921년이다.
백 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은 말을 그냥 도구라고 생각한다.
도구라고 생각하니까 대충 쓴다. 대충 쓰니까 대충 생각한다. 대충 생각하니까 세상이 대충 보인다. 그걸 세상 탓이라고 생각한다.
말이 닿는 데까지가 생각이 닿는 데까지다. 생각이 닿는 데까지가 세상이 보이는 데까지다.
지금 자기 말이 얼마나 멀리 닿고 있는지, 한번 재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 좋아요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