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하지 않은데, 공평함을 믿는다면
sean··읽음 17
어릴 때는 세상이 공평한 줄 알았다.
누가 먼저 때리면 선생님이 벌을 주고, 줄을 새치기하면 뒤로 보내지고, 시험은 점수대로 등수가 매겨졌다. 억울한 일이 생기면 어른에게 말하면 됐다. 어른은 잘잘못을 가려주는 사람이었고, 세상에는 규칙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믿음을 갖게 됐다.
내가 잘못하지 않으면, 세상도 나를 잘못 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믿음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직장에 들어가면 된다.
일을 잘해도 승진은 딴 사람이 하고, 아이디어를 냈는데 상사가 자기 것처럼 보고하고, 불평 없이 야근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이 제일 호구가 된다.
항의하면 "사회가 원래 그래"라는 말이 돌아온다.
그 순간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분노하거나, 배우거나.
대부분은 분노를 선택한다. 당연하다. 분노가 더 쉬우니까.
"이건 불공평해." "나한테 이럴 수는 없어." "사과를 받아야겠어."
이 세 문장을 반복하면서 에너지를 쓴다. 상대방에게 잘못을 인정하게 만들려고,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피해자라는 것을 알리려고, 공정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그런데 한 가지 묻겠다.
그래서 사과를 받은 적이 있는가. 받았다면, 그 사과가 진심이었는가. 진심이었다면, 그것으로 뭔가 돌아온 것이 있는가.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를 쓰면서 이런 관찰을 남겼다. 로마 원로원이 무너진 것은 외적의 침입 때문이 아니라, 원로원 의원들이 서로에게 공정한 대우를 요구하느라 실제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공평함을 지키는 데 모든 에너지를 쓰는 조직은, 정작 공평하게 나눌 것을 만들지 못한다.
국가도 그런데 하물며,,,
개인도 마찬가지다.
공평 공정은 듣기 좋지만
공평함을 요구하는 행위는 에너지 소모전이다. 상대가 인정하지 않으면 더 많은 에너지를 쓰게 되고, 상대가 인정해도 이미 그 에너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긴 쪽도 진 쪽도 소모된다. 남는 것은 피로뿐이다.
도덕경 79장에 이런 구절이 있다.
和大怨 必有餘怨
큰 원한을 풀어도 반드시 남은 원한이 있다.
노자가 2500년 전에 이미 말한 것이다. 원한이라는 것은 풀어도 찌꺼기가 남는다. 사과를 받아도 마음 한구석이 개운하지 않고, 보상을 받아도 그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관계를 회복해도 전과 같지 않다. 원한을 푸는 데 성공한 사람조차 온전히 풀리지 않는데, 풀지도 못한 채 매달려 있는 사람은 어떻겠는가.
노자의 해법은 간단하다.
是以聖人執左契 而不責於人
성인은 빌려준 증서를 쥐고 있되, 남에게 독촉하지 않는다.
빌려준 것을 잊으라는 말이 아니다. 기록은 하되, 돌려받으려고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받을 것은 기억하되 그것에 매이지 않는다. 매이는 순간, 빌려준 쪽이 오히려 약자가 된다.
직장에서 아이디어를 빼앗긴 사람은 두 가지를 할 수 있다.
하나, 상사에게 따지고, 동료들에게 하소연하고, 인사팀에 신고한다. 공정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올 수도 있다. 나오더라도 그 상사 밑에서 계속 일해야 한다.
둘, 그 아이디어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낸다. 한 번 더 빼앗기면 또 낸다. 세 번째쯤 되면 주변에서 누구의 머리인지 안다. 다섯 번째쯤 되면 그 상사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먼저 부른다.
첫 번째는 정의롭다. 두 번째는 효과적이다.
세상은 정의로운 쪽보다 효과적인 쪽에 보상을 준다. 이것이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맞다. 불공평하다. 그런데 그 불공평함에 항의하는 동안, 두 번째를 선택한 사람은 이미 세 번째 아이디어를 만들고 있다.
사람 사이도 다르지 않다.
친구가 뒤에서 험담을 했다. 연인이 약속을 어겼다. 가족이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런 일이 생기면 본능적으로 해명을 요구한다. 왜 그랬는지 묻고, 사과를 기다리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그런데 사과라는 것의 본질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상대방이 "내가 틀렸다"고 인정하는 행위다. 사람이 자기가 틀렸다고 진심으로 인정하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가. 입으로는 미안하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네가 너무 예민한 거야"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받아낸 사과의 대부분은 가짜다. 상대가 진짜 반성해서 하는 사과가 아니라, 이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어서 하는 사과다. 그걸 받아들고 뭘 어쩌겠다는 건가?
그런데 사과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사과를 받아내지 못하면, 마음속에 무언가 풀리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그것이 집착이 되고, 스스로를 파괴한다.
일본 전국시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젊은 시절 대부분을 인질로 보냈다. 동맹을 맺은 영주에게 보내졌다가, 적에게 넘겨졌다가, 다시 돌아왔다가. 공평한 대우를 받은 날이 거의 없었다.
그가 한 일은 불공평함에 항의하는 것이 아니었다. 인질로 있는 동안 병법을 배웠고, 주변 영주들의 약점을 관찰했고, 자기를 함부로 대한 사람들의 패턴을 기억했다. 그리고 힘이 생겼을 때 그 기억을 꺼냈다.
그는 사과를 요구하지 않았다. 사과받을 필요 없는 위치에 올라갔다.
결국 이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다.
공평함을 바라는 것은 상대에게 나의 기분을 맡기는 것이다. 상대가 인정하면 풀리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 풀린다. 내 마음의 열쇠를 남에게 쥐어주는 셈이다.
약한 사람은 이해해달라고 한다. 알아달라고 한다. 잘해달라고 한다.
강한 사람은 조용히 강해진다. 조용히 걸러낸다. 조용히 자기를 지킨다.
이 두 부류 사이에 공평함의 차이는 없다. 단지 에너지를 쓰는 방향이 다를 뿐이다.
한 가지 더.
공평함을 바라지 말라는 말이, 부당함을 참으라는 뜻은 아니다.
참는 것과 매이지 않는 것은 다르다. 참는 것은 분노를 삼키는 것이고, 매이지 않는 것은 분노를 쓸 곳을 바꾸는 것이다. 삼키면 몸이 상하고, 바꾸면 힘이 된다.
세상에 공평 공정하게 당신에게 답을 줄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다. 있다. 다만 그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당신의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시간은, 누가 옳았느냐와 상관없이, 준비된 쪽에 기회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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