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러 간다는 것은 어쩌면
sean··읽음 22
관찰해보거나, 아이를 키워 본 사람들은 안다.
아이들은 미끄럼틀을 열두 번째 타면서도 지칠 줄을 모른다. 벤치에 앉은 부모들은 눈이 풀려 있다. 커피를 두 잔째 마시면서도 졸음이 안 깬다. 아이에게는 에너지가 남아돌고, 어른에게는 에너지가 바닥나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아이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고, 어른은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피곤한 부모가 돈을 내고 아이 돌보미를 부르면, 부모의 피곤은 줄어든다. 그런데 상당수의 아이 돌보미는 그 일을 좋아해서 하는 게 아니다. 돈이 필요해서 하는 것이다.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이 그 일을 잘할 가능성은, 솔직히 말하면 높지 않다. 그러니까 가끔씩 어린이 집 그런데서 학대 사건이 나오지 않나? 하기 싫은 일을 하니까 스트레스가 쌓이고, 그게 어린이에게 가고
그러니까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이런 거다.
하기 싫은 일을, 없애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
귀찮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걸 '귀찮음의 보존 법칙'이라고 불러 보자.
엄마가 낮에 회사에 나가서 번 돈으로 아이돌보미를 부른다. 아이돌보미는 남의 아이를 돌보면서, 자기 아이는 친정엄마에게 맡긴다. 친정엄마는 손주를 키우면서, 윗대 어르신이 아프시면 그 간병까지 안고 가거나, 본인이 몸이 상한다.
이 사슬 위에 서 있는 사람 중에, 편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모두가 가운데에 서 있다. 위에서 내려오는 일을 받고, 아래로 자기 일을 내려보낸다. 사슬의 한쪽 끝에는 "이 일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야"라고 느끼면서 피곤해하는 내가 있고, 반대쪽 끝에는 더 이상 내려보낼 곳이 없는 누군가가 있다.
우리는 이 사슬에 이름을 붙여놓았다. '분업'이라고. 또는 '시장경제'라고.
돈으로 사는 건 '누군가 기꺼이 해 주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 경우가 많다.
그런데 때로는 힘든 일일수록 돈을 적게 준다. 이상하지 않은가. 상식대로라면 힘들수록 많이 줘야 하는데. 진짜 가격을 결정하는 건 일이 힘든 정도가 아니라, 그 일을 맡을 사람이 얼마나 궁한가다. 궁하기에 다른 선택지가 없기에 힘들어도 그 일을 해야 한다.
한여름 도로 위에서 일하는 사람, 남의 집 어르신을 씻기는 사람, 새벽 네 시에 배달 나가는 사람. 이 일들의 가격은 힘든 만큼 매겨진 게 아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 가격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라는 게 이 구조 안에서는 좀 이상한 것이 된다. 나는 돈을 내고 '이 일 안 해도 되는 자유'를 샀는데, 그 자유는 다른 사람의 '선택지 없음'에서 온 것이다. 강탈한 것도 아니고, 계약서도 있고, 쌍방 합의고, 법적으로 흠잡을 데가 없다.
다만 내가 가벼워진 만큼, 누군가는 무거워졌다.
이 사슬에서 가장 기묘한 자리는, 마음을 써야 하는 일이다.
아이를 돌보는 일, 늙은 부모를 모시는 일, 사람을 가르치는 일. 이런 일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그 자리에 있는 것'까지다. '진심으로 신경 쓰는 것'은 돈으로 못 산다.
계약서에 하루 세 끼 차려 드린다고 적을 수 있다. 밤에 한 번 기저귀 확인한다고 적을 수 있다. 그런데 "넘어질까 봐 내가 먼저 조마조마해 주는 것", "새벽에 아이가 뒤척이면 나도 같이 깨는 것"은 계약서에 적을 수가 없다. 그런데 진짜 원하는 건 바로 그거다.
그래서 양쪽 다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다. 아이돌보미는 가족인 척하고, 부모는 그걸 가족이라고 믿는 척한다. 누구도 이 연극을 깨지 않는다. 깨는 순간 이 거래가 성립이 안 되니까.
더 씁쓸한 건 그다음이다. 아이는 매일 자기를 안아 주고, 재워 주고, 넘어질 때 잡아 주는 사람에게 마음이 간다. 돈을 내고 다른 사람에게 맡긴 시간 동안, 아이 마음속 그 자리도 같이 내준 셈이다.
돈 한 번에 두 가지를 넘긴 것이다. 낮 시간의 체력과, 원래 자기 것이었을 가까움과 정을
물론 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이 낳고 어쩔수 없어서 (돌봄 비용이 너무 높아서)
본인 일을 포기하고, 스스로 돌봄을 하면서
행복도 하지만, 또 스스로 일을 놓음으로 불안감과 경제적 힘듬을 겪기도 하고
그런데 또 이런 사람도 있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인데, 그 돈보다 훨씬 더 잘하는 사람. 그 이유가 그 일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자기한테 맡겨진 일을 대충 못 하는 성격이라서다. 그건 계약에서 오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거는 기준에서 온다. 보통 정관이 탄탄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
다만 그런 사람에게도 한계는 있다. 근무 시간은 길고, 돈은 적고, 사람 취급은 안 받고, 밥 한 끼 편하게 먹을 시간도 없는데, 거기다 대고 "마음을 담아서 해 주세요"라고 요구하는 건, 아무리 성실한 사람이라도 버티기 어렵다.
좋아하게 만들 수는 없어도, 싫어하지 않게 만들 수는 있다. 돈을 조금 더 주고, 쉬는 시간을 조금 더 주고, 사람으로 대해 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많은 일의 질이 달라진다. 한국은 잘 모르겠는데, 중국에서는 팡동라이라고 슈퍼마켓 체인이 이렇다. 급여는 일반 슈퍼의 2-3배인데, 휴가는 훨씬 길다. (보통 중국의 이런 슈퍼마켓 노동자는 휴식시간도 적은데, 여긴 하루 6시간인가 일하던가,,, 년1개월 휴가 주던가 ,,, 어쨌든 초특급 대우를 한다. 그래서 석사들도 슈퍼에 지원한다. )
일하러 가는 것은
보통은 인간의 본성을 위배하기 쉽다는 이야기다.
일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사람은 원래 뭔가를 하게 되어 있다. 사냥을 하든, 밭을 갈든, 의자 하나를 만들든, 온몸이 부서지도록 움직이고 나면 밤에 잠이 잘 온다. 손으로 뭔가를 만들고, 자기가 한 일의 결과를 눈으로 보는 것, 그게 사람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우리가 원하는 삶의 방식, 그러니까 강요받지 않고, 시간을 내 맘대로 쓰고, 내가 납득하는 일을 하는 삶. 이걸 얻으려면 다른 누군가를 선택지 없는 자리로 밀어 넣어야 한다.
내가 한 발 올라설 때마다, 아래에서 한 사람이 더 서 있어야 한다.
힘든 건 참을 수 있다.
이 구조가 우리를 전부 같은 사슬 위에 올려놓고, '내가 싫은 일을 하느냐'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내가 싫은 일을 시키느냐' 둘 중 하나를 고르게 만든다는 거다.
아니,, 때론 고를 수 없다. 대다수는 어쩔수 없어서 하니까
가장 불편한 자리는 사슬 맨 아래쪽이다.
위에서 내려온 것을 전부 받으면서, 자기는 더 이상 내려보낼 곳이 없는 사람. 떠넘겨진 귀찮음이 전부 쌓이는 자리다.
받아낼 수도 없고, 넘길 수도 없다. 그냥 자기가 삼킨다.
우리는 그 사람을 못 보거나, 보고도 못 본 척한다. 보통은 못 본다.
혹은 그러게 학창시절에 열심히 공부하지 그랬어?
그렇게 생각하지
어릴때 부모님이 이야기하던 것
너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나이 먹어서 뭐 한다...
그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많으니까
도덕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天下莫柔弱於水 而攻堅強者莫之能勝
세상에서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지만,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기는 데는 물을 당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물의 본성이고, 사슬 아래로 흐르는 것이 귀찮음의 본성이다. 그런데 물은 낮은 데 모여서 결국 바다가 된다. 귀찮음은 낮은 데 모여서 한 사람을 갉아먹는다.
차이는 하나다. 물은 아무도 무시하지 않는데,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무시당한다.
돈으로 귀찮음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돈은 귀찮음을 옮길 뿐이다.
있는 사람 몸에서, 필요한 사람 몸으로. 그게 전부다.
이걸 알고 나면, 돈을 쓸 때 마음이 달라진다. 그 일을 맡아 주는 사람에게 한마디 더 건네는 것, 그건 돈이 안 드는 일이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그날 하루에 받는 유일한 온기일 수 있다.
가벼운 것이 떨어지면 무겁게 닿는 법이 있다.
"돈 냈으니까"가 사람을 함부로 대해도 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산 건 그 사람의 시간이지, 그 사람의 자존심이 아니다.
그리고 나도 사슬 위에 서 있다는 건 잊지 않는 편이 낫다. 나도 피곤하고, 나도 억울하고, 나도 떠넘기고 싶다. 사슬 위의 모든 고리가 다 그렇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도 포함해서.
마지막으로, 내가 진짜 원하는 게 그 일 자체인지, 아니면 그 일이 가져다주는 다른 무엇인지, 구분은 해 두는 게 좋다. 일 자체가 좋으면 들어간 시간이 아깝지 않다. 다른 무엇 때문에 하는 거라면, 오래 버티기 어렵다.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좋아하는 척 매일 출근하는 건, 연극이다. 연극을 오래 하면 무대 위의 내가 진짜 나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전부, 자기가 하기 싫은 인생의 한 조각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모르는 사람에게 넘기고, 그 사람은 다시 자기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넘기고 있다.
이 사슬은 알았다고 끊어지지 않는다.
출근도 해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하고, 누군가에게 맡길 일은 또 생긴다.
다만 이 사슬 위에서 하나 정도는 정할 수 있다.
내 아래에 있는 고리를, 사람으로 볼 것인가 도구로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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