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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자기연민 쇼에 관객이 되지 마라

sean··읽음 28
조심해야 할 사람이 있다. 아주 사적이고 절제된 목소리로, 자기가 겪은 고생을 이야기하는 사람. 살짝 자조적인 웃음까지 곁들이면서, 마치 남 이야기하듯 담담하게 풀어놓는 사람. 그런데 듣다 보면 어딘가 이상하다. 이 사람은 위로를 원하면서도, 해결은 거부한다.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면서, 들여다보는 건 허락하지 않는다. 뭐가 어긋난 건지 딱 짚기는 어려운데,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내가 어느새 이 사람의 관객석에 앉아 있다는 것. 중국 인터넷에서 이런 행동을 부르는 말이 있다. 自嬷. 본래 '嬷'는 누군가를 약하고 작은 존재로 여기며 품어주는 행위를 뜻하는데, 그 방향을 자기 자신에게 돌린 것이다. 스스로를 품어주고, 쓰다듬고, 전시하는 행위. 한국어로 딱 떨어지는 말은 없지만, 굳이 옮기면 '자기연민의 무대화'쯤 될 것이다. 이게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자기를 높이는 쪽이다. 대화 안에 슬쩍 우월감을 깔아놓고, 상대방이 눈치 못 채게 거울 역할을 시킨다. "내가 겪은 건 네가 견딜 수 있는 종류가 아니야." 이 말을 직접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듣고 나면 그런 느낌이 남는다. 다른 하나는 자기를 낮추는 쪽이다. 자기를 작고 연약한 존재로 만들고, 상처를 마치 분재처럼 가꾼다. 아프다는 걸 보여주되, 낫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아픈 모습이 누군가에게 보이고, 안쓰러워하는 시선을 받고, 그 시선 속에서 자기를 확인한다. 이 두 가지는 방향만 반대지, 하는 일은 같다. 자기 내면을 작품으로 만들어서 관객 앞에 전시하는 것이다. 이건 고백이 아니다. 공연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나쁜 사람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자기연민을 무대에 올리는 사람은 대부분 진짜로 아프다. 자라면서 있는 그대로의 감정이 받아들여진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울면 혼났고, 약하면 무시당했고, 평범하면 존재감이 없었다. 그래서 감정을 날것으로 내놓는 대신, 가공하는 법을 배웠다. 울음을 '성장 서사'로 포장하고, 나약함을 '통찰'로 번역하고, 평범함에 그럴듯한 이야기를 입혔다. 이건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다. 심리학자 스티븐 카프만(Stephen Karpman)이 1968년에 제안한 '드라마 삼각형(Drama Triangle)'이 이걸 잘 설명한다. 사람들이 갈등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취하는 세 가지 역할이 있다. 피해자, 구원자, 박해자. 자기연민을 무대에 올리는 사람은 스스로 피해자 자리를 선택한다. 그 자리에 앉으면 구원자가 찾아오고, 구원자가 오면 관계가 생기고, 관계가 생기면 존재가 확인된다. 문제는, 그 피해자 자리가 너무 편하다는 것이다. 거기 앉아 있으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고, 변하지 않아도 되고, 실패해도 면죄부가 생긴다. 그래서 벗어나지 않는다.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벗어나면 잃을 게 너무 많다. 그 밑에 깔린 심리를 좀 더 들여다보면, 몇 가지 층이 보인다. 평범함이 두려운 것이다. 그냥 보통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너무 아프니까, "나는 다른 사람이 겪지 못한 것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상처가 훈장이 되고, 고통이 자본이 된다. 그러면 평범함에도 무게가 실리고, 자기 자리에 대체 불가능성이 생긴다. 남의 고통은 복제할 수 없으니까. 이런 사람에게 연민을 표시하다가 망가지기 쉽다. 특히 공감능력이 좋은 분들 '보여지는 것'에 굶주린 것이다. 이 시대에 모든 사람이 표현하라는 독려를 받지만, 정작 진짜로 들어주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를 봐주는 것'이 일종의 은밀한 종교가 됐다. 자기연민을 무대에 올리는 사람은 제단 한가운데 서서, 자기 아픔을 제물로 바친다. "나를 알아줘"라는 한마디를 듣기 위해. 약한 자리에서 나오는 묘한 힘이다. "나 괜찮아"라고 단단하게 말하는 사람은 붙잡을 수가 없다. 그런데 상처를 반쯤 보여주면서 반쯤 감추는 사람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빚을 지게 만든다. 약함을 보여주는 것이, 때로는 아주 조용한 형태의 요구이자 통제가 된다. 그리고 고통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수전 손택(Susan Sontag)이 1978년에 쓴 '은유로서의 질병(Illness as Metaphor)'에서 정확히 이걸 짚었다. 고통을 은유화하고 미학적으로 포장하면, 그 고통은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의미가 생기면 해결할 필요가 사라진다. 충분히 예쁜 상처는 아무도 낫게 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이야기가 너무 잘 다듬어져 있다. 겪은 일이 이미 기승전결이 있는 서사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고통에 딱 맞는 분량감이 있어서, 듣는 사람이 마음 아파하기에 충분하되 반박하기에는 부족하다. 날것이 아니다. 편집본이다. 마음을 써주는 것까지만 원한다. 해결책을 내밀면 분위기가 갑자기 식는다. 끝까지 도우려 하면 문은 늘 반쯤 열려 있되, 진짜로 열리지는 않는다. 받고 싶은 건 동정이지, 출구가 아니다. 낮추고 확인 받고를 되풀이한다. 자기를 낮은 데 두고, 누군가가 올려주기를 기다린다. 올려주면 잠깐 받아들이다가, 곧 다시 낮은 데로 돌아간다. 이건 겸손이 아니라, 멈출 수 없는 확인 작업이다. "나는 사랑받을 만한 사람인가?"를 끝없이 묻고 있는 것이다. 나아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이게 핵심이다. 고통이 해결되면 서사가 무너진다. 그 거울이 치워지고, 관객이 떠나고, 다시 평범하고 기댈 데 없는 자기와 마주해야 한다. 그래서 낫는 것이 오히려 손해다. 그러면 왜 관객이 되면 안 되는가. 첫째, 소리 없이 닳는다. 공감이라는 건 잔고가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걸 '공감 피로(Compassion Fatigue)'라고 부른다. 1995년 찰스 피글리(Charles Figley)가 체계화한 개념인데, 원래는 돌봄 직종 종사자들이 타인의 고통에 반복 노출되면서 정서적으로 소진되는 현상을 가리켰다. 그런데 이건 직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교하게 가공된 자기연민에 반복적으로 공감하다 보면, 정작 진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나타났을 때 이미 바닥이 나 있다. 자기연민 쇼가 훔쳐가는 건 시간이 아니라, 동정할 수 있는 능력의 남은 양이다. 그래서 솔직히 역학을 직업으로 하면, 굉장히 피곤해진다는 이야기다. 공감능력 좋은 분들 , 인성이 강한 분들 특히 그렇다. 둘째, 절대 이길 수 없는 게임에 끌려 들어간다. 이 관계에서는 반응이 언제나 '부족하다'. 마음을 쓰면 더 원하고, 지치면 버림받았다고 느낀다.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는 자리에 끼인다. 빚진 것 같으면서 억울한, 그 어정쩡한 위치. 더 나쁜 건, 결국 반응을 멈추면 "변했다", "차가워졌다"는 말을 듣게 된다는 것이다. 내 경계가, 상대에게는 내 잘못이 된다. 셋째, 친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진다. 거울만 필요한 사람은 사람을 만날 수가 없다. 한병철(韓炳哲)이 '타자의 추방(Die Austreibung des Anderen)'에서 쓴 것처럼, 지금 시대의 자기애적 주체는 타인에게서 자기 자신만을 찾는다. 거울 노릇을 해줄수록 그 순환은 굳어진다. 거울은 말을 하지 않고, 친구는 진짜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이 원하는 건 메아리지, 대화가 아니다. 넷째, 선의로 공범이 된다. 무한정 마음을 써주는 게 자비가 아니다. 상대의 서사를 끝없이 먹여 살리면, 실은 그 사람의 감옥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꼴이 된다. "내 가치는 내가 얼마나 안쓰러운가에 달려 있다"는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 상대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대를 그 상태로 고착화 시킬 수 있다. 그래서 인터넷 댓글이라도, 이런 사람에게는 위로를 보내고, 맞다고 해주는게 악행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이 관객석에 앉게 된 건가. 이런 사람들이 관객을 고르는 건 무작위가 아니다. 감정이 안정적이고, 말이 잘 통하고, 방어벽이 낮고, 남의 기분을 잘 살피는 사람. 이런 사람이 가장 편한 관객이다. 반박하지 않고, 떠나지 않고, 나중에 혼자 "내가 좀 더 잘해줄 걸" 하고 반성까지 한다.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에 은근히 중독된 사람도 타깃이 된다. 누군가가 무너질 때 외면하지 못하는 착한 사람. 이 사람의 선함 안에는, 자기도 잘 모르는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다"라는 갈증이 숨어 있다. 자기연민을 무대에 올리는 사람은 이걸 귀신같이 알아본다. 한쪽은 필요한 느낌을 주고, 한쪽은 가치감을 받고, 딱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둘 다 닳는다. 빠져나갈 수 없는 공간도 무대가 된다. 사무실, 가족 모임, 작은 동호회, 새벽의 메신저 창. 관객이 도망칠 수 없는 곳이 최적의 극장이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이런 사람들을 차갑게 대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 그건 아니다. 자기연민을 무대에 올리는 사람은, 사실 가장 안아줘야 할 사람이기도 하다. 이 사람들이 나쁜 게 아니라, 진짜 연결이 너무 드문 시대가 이 사람들을 거울 앞으로 몰아간 것이다. 지켜보는 것으로 사랑을 대신하고, 보여주는 것으로 안아줌을 대신하는 것이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상처 밑에는,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하는지 끝내 배우지 못한 사람이 있다. 그래서 관객이 되지 말라는 것이지, 사람이 되지 말라는 건 아니다. 박수도 치지 않고, 심판도 하지 않고, 그냥 진짜 말을 하는 사람. 서사를 먹여 살리지도 않고, 자존심을 건드리지도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앞에 서면, 무대는 무대이기를 멈춘다. 도덕경에 이런 말이 있다. 五色令人目盲 다섯 가지 색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보여주는 것이 많아질수록, 정작 보아야 할 것은 안 보인다. 자기연민의 무대가 화려할수록, 그 밑에 있는 진짜 사람은 더 깊이 가려진다. 때로는 거울을 치워야, 빛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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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答2
  • 블루베리파이·

    감사드립니다

  • 은율·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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