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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과 부의 상관관계 - 부자는 노력했지만 노력이 부자를 만들지는 않는다

sean··읽음 24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말은 반만 맞다. 성공한 사람 중에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주 당 80시간씩 일한다. 그렇기에 40시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노력을 안해서 성공 못한다고 생각한다. 나약하다고 생각한다. 성공의 시간의 길이를 길게 보면, 성공한 사람들은 100%, 일반인보다 월등히 많이 노력한다. 그런데 문제는 노력한 사람 중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무수히 많다. 이 비대칭을 무시하면 세상이 공정해 보이고, 인정하면 풍경이 완전히 달라진다. 어떤 영역이 뜨면 그 안에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든다. 재능 있고, 열정적이고, 밤을 새가며 일한다. 닷컴 버블 때 실리콘밸리가 그랬고, AI 붐이 터진 지금도 그렇다. 전부 탑급으로 똑똑하고 전부 열심히 한다. 그런데 결과는 극단적으로 갈린다. 스타트업 게놈(Startup Genome) 조사에 따르면 혁신형 스타트업의 90%가 실패한다. 벤처캐피탈 투자를 받은 회사도 75%가 망한다. 투자를 받았다는 것은 이미 사업 모델과 팀의 역량이 외부 검증을 통과했다는 뜻이다. 그래도 네 개 중 세 개가 사라진다. 더 뛰어난 팀, 더 많은 자금, 더 좋은 네트워크를 가지고도 실패하는 쪽이 성공하는 쪽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여기서 성공과 실패를 가른 것은 무엇인가. 노력이 아니다. 전부 노력했다. 할리우드도 같은 구조다. 미국 배우 노조(SAG-AFTRA) 회원이 약 16만 명이다. 이 중 연간 1,000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는 비율이 12%다.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Nature Communications)에 실린 150만 명 규모의 배우 경력 분석에 따르면, 어느 시점에서든 배우의 약 90%가 일이 없는 상태다. 대부분의 배우 경력은 1년 안에 끝난다. 이 사람들이 재능이 없어서 탈락한 것인가. 노력을 안 해서인가. LA에 가보면 안다. 웨이터를 하면서 오디션을 보고, 연기 수업에 돈을 쏟고, 수백 번 거절당하면서도 다시 가는 사람들이 거리에 넘친다. 그중에서 먹고살 수 있는 배우가 되는 비율이 10%도 안 된다. 성공한 배우가 인터뷰에서 "포기하지 마세요"라고 말할 때, 포기하지 않았는데도 안 된 90%는 카메라 밖에 있다. 2018년 이탈리아 카타니아 대학의 알레산드로 플루키노(Alessandro Pluchino) 연구팀이 이 구조를 시뮬레이션으로 증명했다. 1,000명에게 재능을 정규분포로 부여하고, 같은 출발선에서 40년의 커리어를 돌렸다. 결과는 이랬다. 상위 20명이 전체 부의 44%를 차지했고, 절반 가까이는 출발점 이하로 떨어졌다. 재능의 분포는 정규분포인데 부의 분포는 극단적으로 쏠렸다. 가장 성공한 사람은 가장 재능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평균적인 재능에 유리한 우연이 겹친 사람이었다. 연구팀의 표현을 빌리면, "뛰어난 재능도 불운 앞에서는 쓸모가 없다." 이 시뮬레이션이 보여주는 것은 불편하지만 단순하다. 노력과 재능은 경기에 참가하기 위한 입장권이지, 우승을 보장하는 카드가 아니다. 코넬 대학의 경제학자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는 이것을 경로 의존성으로 설명한다. 같은 학교를 나오고 같은 업종에서 같은 시간을 일한 두 사람이 전혀 다른 결과에 이르는 것은, 한쪽이 게을렀기 때문이 아니라 경로 위에 놓인 우연의 배치가 달랐기 때문이다. 초기의 작은 차이가 한 걸음씩 증폭되어 완전히 다른 목적지에 도달한다. 누군가의 자리가 비어서 기회가 왔고, 마침 그 타이밍에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 기회가 다음 기회를 불러왔다. 이런 연쇄가 쌓이면 바깥에서는 그것이 실력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첫 번째 고리는 대개 본인이 만든 것이 아니다. 이것은 2차 대전 때 에이브러햄 볼드(Abraham Wald)가 지적한 것과 같은 구조다. 귀환한 전투기의 총탄 자국만 보고 그 부위를 보강하려던 군부에게 볼드가 말했다. 총탄 자국이 없는 곳을 보강해야 한다고. 거기에 맞은 비행기는 돌아오지 못했으니까.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만 모아놓으면 노력이 답처럼 보인다. 실패한 사람의 이력서를 같이 펼쳐놓으면, 노력은 공통 변수일 뿐 성패를 가른 변수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여기까지가 조건이 좋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재능이 있고, 자원이 있고, 기회의 문 앞까지는 갈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도 노력이 성패를 결정하지 못한다면, 조건이 나쁜 사람들에게 노력을 요구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마시멜로 이야기부터 꺼내야겠다. 1960~70년대 스탠퍼드의 월터 미셸(Walter Mischel)이 한 실험이 있다. 네 살짜리에게 마시멜로 하나를 주고 "15분 기다리면 하나 더 줄게"라고 한 뒤, 기다린 아이가 나중에 더 성공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것은 자제력이 곧 성공이라는 서사의 상징이 되었고, 가난한 사람은 자제력이 부족하다는 논리로 곧장 연결되었다. 그런데 2018년 NYU의 타일러 왓츠(Tyler Watts)가 원래의 10배 규모인 918명으로 재현했을 때, 가정 배경을 통제하면 상관관계가 거의 사라졌다. 어머니의 학력이 대졸인 아이는 68%가 끝까지 기다렸고, 대졸 미만인 어머니의 아이는 45%만 기다렸다. 2024년 차일드 디벨롭먼트(Child Development)에 실린 후속 연구는 702명을 26세까지 추적했는데, 소득, 우울증, 약물 사용 등 아홉 가지 지표에서 마시멜로 기다림이 예측한 것은 사실상 없었다. 지연 만족(Delayed Gratification)이라 불렸던 것의 실체는 환경이었다. 약속이 지켜지는 집에서 자란 아이는 기다린다. 내일도 마시멜로가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약속이 자주 깨지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지금 잡는다. 그것이 그 환경에서의 합리적 판단이기 때문이다. 충동이 아니라 적응이다. 그런데 바깥에서 보면 그것은 자제력 부족으로 읽힌다. 가난한 사람의 선택이 항상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판단 기준이 다른 세계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가난은 판단의 기반 자체를 바꾼다. 하버드의 센딜 뮬레이너선(Sendhil Mullainathan)은 이것을 대역폭 세금(Bandwidth Tax)이라 불렀다. 돈 걱정이 인지 자원을 잡아먹어서 IQ 13점에 해당하는 능력 저하가 일어난다. 밤을 새운 것과 같은 수준이다. 이 상태에서 장기적 계획을 세우라고 하는 것은, 잠을 안 재워놓고 운전을 잘하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환경의 힘은 숫자로 드러난다. 미국 주택도시개발부(HUD)의 이동의 기회(Moving to Opportunity) 실험에서, 가난한 동네를 떠나 더 나은 동네로 이사한 가정의 아이들은 20대 중반에 소득이 대조군 대비 31% 높았다. 단, 13세 이전에 이사한 경우에만. 성인은 소득 변화가 없었다. 하버드의 라즈 체티(Raj Chetty)가 밝혀낸 더 큰 숫자가 있다. 미국에서 소득 하위 20%에서 태어나 상위 20%에 도달할 확률은 8.4%다. 산호세에서 태어나면 12.9%, 애틀랜타에서 태어나면 4.5%. 같은 나라 안에서 우편번호가 기회를 세 배 차이 나게 만든다. 학교의 질, 지역사회의 네트워크, 인종 분리의 정도. 전부 태어나기 전에 정해지는 것들이다. 아워 월드 인 데이터(Our World in Data)의 국가별 노동 시간 통계가 이 그림을 한 번 더 확인시켜 준다. 캄보디아 노동자는 연간 약 2,500시간을 일한다. 스위스는 1,600시간이 안 된다. 900시간을 더 일한다. 그런데 캄보디아의 시간당 노동 생산성은 3달러이고 스위스는 83달러다. 더 많이 일하는 나라가 더 가난하다. 미국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노동통계국 2022년 자료에 따르면 연간 27주 이상 일하면서도 빈곤선 아래에 있는 사람이 640만 명이다. 이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노력이 작동하지 않는 조건에서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조건이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노력은 성패를 가르지 못한다. 같은 영역에 비슷한 재능과 비슷한 열정으로 뛰어든 사람들 중 극소수만 살아남는다. 조건이 나쁜 사람들에게는 더 심하다. 노력의 엔진인 인지능력 자체가 가난에 의해 깎이고, 판단의 토대인 환경이 선택의 폭을 좁힌다. 그런데 성공한 사람만 마이크를 잡기 때문에 "노력하면 된다"가 세상의 전부처럼 들린다.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58년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Michael Young)의 풍자 소설이었다. 영은 능력에 따라 보상하는 사회가 새로운 계급을 만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풍자로 만든 단어가 반세기 뒤에는 찬양의 대상이 되었다. 이 논리가 매력적인 이유는 단순하다. 성공한 사람에게 면죄부를 주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것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다. 이 전제가 성립하면 못 가진 사람은 노력하지 않은 것이 되고, 시스템을 손볼 이유가 사라진다. 오랜 시간 세상을 관찰해온 결과, 하나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시장은 노력을 보상하지 않는다. 시장은 위치를 보상한다. 같은 종목을 사도 언제 샀느냐가 수익을 결정한다. 같은 사업을 해도 어느 시기에 어느 도시에서 시작했느냐가 생사를 가른다. 노력은 그 위치에서 살아남는 데 필요하지만, 위치 자체를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명리학(命理學)에서는 이것을 명(命)과 운(運)으로 나눈다. 명은 태어난 조건이고, 운은 시간에 따라 흐르는 기회의 흐름이다. 노력은 이 둘 사이에서 작동하는 것이지, 이 둘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운이 와도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지나가고, 준비가 되어 있어도 운이 안 오면 기다려야 한다. 노력은 준비다. 운을 만들어내는 힘이 아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운이라는 변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하는 순간 시스템의 책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부자는 노력했다. 맞다. 그런데 노력한 사람이 부자가 되지는 않는다. 스타트업의 90%가 실패하고, 배우의 90%가 일이 없고, 하위 20%에서 태어난 사람의 91.6%가 바닥 근처에 머문다. 이 숫자들 앞에서 노력은 필요조건 이상의 자리를 주장하기 어렵다. 실패한 사람은 강연에 서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은 성공담으로 가득 차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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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答2
  • 익명.·

    감사합니다.

  • 키네시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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