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가장 큰 능력은 다시 한 번 자기를 믿는 것이다
sean··읽음 37
요즘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람을 쓰레드에서 봤다.
회사에서 잘렸다. 아내가 이혼하자고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큰 병 진단을 받았다. 신용카드 대금은 못 막았다. 전재산을 날렸다.
이 정도면 불운도 순서를 지켜서 올 법한데, 한꺼번에 몰려온 것이다. 대략 2년안에 발생한 일이다. 나쁜 일은 줄을 서지 않는다.
이 사람 이야기를 듣다가 장자의 말 한 줄이 떠올랐다.
知其不可奈何而安之若命.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 그것을 명으로 여겨 편안히 받아들인다.
이 문장은 인간세편에 한 번, 덕충부편에 한 번, 두 번이나 나온다. 장자가 같은 말을 두 번 한 것은 드문 일이다. 그만큼 하고 싶었던 말이라는 뜻이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포기와 다르다.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인생의 바닥에 앉아 있는 자기 자신까지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도리를 깨우치는데, 나도 한 십년은 걸린것 같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강해져라, 노력해라, 이기는 사람이 되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런데 완전히 졌을 때, 그 초라한 자기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학교에 그런 과목이 없었다.
장자 대종사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자여(子輿)라는 사람이 병이 들었다. 허리는 굽고 등은 솟고, 턱이 배꼽에 닿을 지경이 되었다. 오늘로 치면 몸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친구 자사(子祀)가 문병을 갔다. 그런데 자여는 우는 게 아니라 우물가에 서서 자기 몸을 비춰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조물주가 나를 이렇게까지 구부려 놓았구나, 하면서.
자사가 물었다. 자네는 그게 싫지 않은가.
자여가 답했다. 싫을 게 뭐 있나. 내 왼팔이 닭으로 변하면 그걸로 새벽을 알리겠네. 오른팔이 활이 되면 그걸로 새를 잡아 구워 먹겠네. 꽁무니뼈가 수레바퀴가 되고 정신이 말이 되면 그 수레를 타고 놀러 다니겠네. 따로 말을 구할 필요도 없지.
浸假而化予之左臂以為雞 予因以求時夜. 이 대목이다.
그리고 덧붙인다. 얻는 것은 때가 되어 온 것이고, 잃는 것은 흐름을 따라 간 것이다. 때에 편안하고 흐름을 따르면 슬픔도 기쁨도 들어올 자리가 없다.
이 이야기는 처음 읽으면 좀 황당하다. 팔이 닭이 된다니. 구워 먹겠다니.
그런데 장자가 황당한 이야기를 고른 데는 이유가 있다. 팔이 닭이 되는 것만큼 어쩔 도리 없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쩔 도리가 없는 것 앞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려고 극단까지 밀어붙인 것이다.
장자가 말하는 사람의 가장 큰 능력은 바꿀 수 없는 일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일을 겪고 나서도 여전히 자기를 믿고, 자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서 믿는다는 말을 짚고 가야 한다.
우리는 자기를 믿는다는 말을 보통 내가 이길 수 있다, 성공할 수 있다,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뜻으로 쓴다.
장자가 말하는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무슨 일을 겪었든 나는 여전히 살아 있을 자격이 있고, 제대로 살 만한 사람이라는 믿음이다. 성적표와 상관없는 믿음이다.
나무 한 그루를 생각해 보자.
봄에 바람에 가지가 꺾였다. 여름에 벼락을 맞아 반쪽이 날아갔다. 가을에 누가 와서 줄기를 베어 갔다. 겨울에는 그루터기만 남았다.
그래도 나무는 나무다. 다음 해 봄이 오면 그루터기에서 새순이 올라온다. 나무가 자기가 나무라는 것을 의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생명의 가장 밑바닥에 깔린 믿음이다.
여기에 어울리는 사람이 하나 있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기록으로 남은 사람이다.
송나라의 소식(蘇軾), 흔히 소동파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마흔셋에 자기가 쓴 시 몇 구절이 조정을 비방했다는 죄로 잡혀갔다. 오대시안(烏臺詩案)이라는 사건이다. 감옥에서 백 일 넘게 갇혀 있으면서 죽을 각오까지 했고, 동생에게 유서 같은 시를 남겼다.
죽지는 않았다. 대신 황주(黃州)라는 시골로 쫓겨났다. 벼슬은 이름만 남았고 녹봉은 없었다. 먹고살려고 동쪽 언덕의 버려진 땅을 개간했다. 동파(東坡)라는 호는 그렇게 얻은 것이다. 성공해서 붙인 이름이 아니라 망해서 붙인 이름이다.
황주에 온 지 세 해째 되던 봄, 그는 사람들과 들길을 걷다가 비를 만났다. 우산을 든 사람들이 먼저 가 버렸다. 일행은 다 낭패라고 여겼는데 그만 혼자 태연했다고, 그는 시 앞머리에 적었다.
그때 쓴 것이 정풍파(定風波)라는 사(詞)다. 마지막 구절이 이렇다.
回首向來蕭瑟處 歸去 也無風雨也無晴. 돌아보니 방금 비바람 몰아치던 그 자리, 돌아가자, 비바람도 없고 맑음도 없다.
비를 맞고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데, 거기에는 비도 없고 갠 하늘도 없더라는 것이다. 비를 피한 것이 아니다. 젖었으면서 젖은 채로 걷는 것이다. 자여가 굽은 몸으로 우물을 들여다보던 것과 같은 자리다.
그 뒤로도 그는 더 멀리 쫓겨났다. 혜주(惠州)로, 그다음에는 바다 건너 담주(儋州), 지금의 해남도까지 갔다. 당시 그 나이에 그곳까지 가는 것은 죽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예순여섯에 마침내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자기 초상화에 시 한 수를 적었다. 죽기 두 달쯤 전이다.
問汝平生功業 黃州惠州儋州. 네 평생 이룬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황주, 혜주, 담주.
평생의 업적이 유배지 세 곳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한탄으로 읽는 사람도 있고 농담으로 읽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든 자기 인생의 가장 초라한 대목 셋을 골라 그것을 이름표로 달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부끄러운 자기를 지우지 않고, 그 자기를 데리고 간 것이다.
다시 우리 이야기로 돌아오자.
밤에 혼자 어둠 속에 앉아 나는 아무 쓸모가 없다, 이 모든 험한 일이 다 내가 자초한 것이다, 이런 생각에 빠져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를 악물고 그 생각을 쫓아내려고도 해 봤을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그 생각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다. 장자가 말한 좌망(坐忘)이다.
좌망은 대종사편에서 안회가 공자에게 보고하는 형식으로 나온다. 몸을 잊고, 앎을 버리고, 큰 흐름과 하나가 되는 것을 좌망이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공자가 오히려 제자를 따라가겠다고 한다. 장자가 공자를 놀리려고 지어낸 장면이지만, 놀림 속에 알맹이가 있다.
좌망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잊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이 나를 어떻게 규정했는지를 잊는 것이다.
나는 나의 실패가 아니다. 나는 나의 상처가 아니다. 나는 남들 눈에 비친 그 패배자가 아니다.
나는 아직 숨을 쉬고, 아직 느끼고, 아직 나아지려고 버둥거리고 있는 하나의 생명체다. 그것이 전부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자기를 용서하는 일은 사람이 평생 하는 공부 가운데 가장 어려운 축에 든다.
남을 용서하는 것은 그래도 된다. 자기를 용서하는 것은 잘 안 된다.
잘못된 결정을 내린 자기.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자기. 결정적인 순간에 삐끗한 자기. 바보 같은 말을 하고 바보 같은 짓을 한 자기.
우리는 그 자기를 영원히 형틀에 묶어 두려고 한다. 그렇게 벌을 주지 않으면 철이 안 든 것 같고, 책임을 안 지는 것 같아서다.
장자 소요유편의 첫머리에 이런 말이 있다.
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 지인은 자기가 없고, 신인은 공이 없고, 성인은 이름이 없다.
나를 부끄럽게 하는 그 자기, 나를 실패자로 만드는 그 공, 나를 창피하게 만드는 그 이름. 실은 전부 내가 내 손으로 채운 족쇄다. 장자는 그것을 벗은 사람을 지인, 신인, 성인이라고 불렀다. 벗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기를 용서하는 것은 자기를 봐주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날 나는 그냥 지쳤던 것이다. 그냥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냥 못 참았던 것이다. 그냥 틀렸던 것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사람의 한평생은 원래 잃고 또 찾는 일의 반복이다. 젊음을 잃고, 가까운 사람을 잃고, 사랑을 잃고, 기회를 잃고, 건강을 잃는다.
잃을 때마다 한 겹씩 벗겨진다. 중요하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것들이 한 겹 한 겹 벗겨져 나간다.
소식은 벼슬을 벗고, 명예를 벗고, 고향을 벗고, 마지막에는 바다 건너까지 가서 남은 것을 확인했다. 그 확인 끝에 나온 말이 황주, 혜주, 담주였다.
끝까지 벗겨지고 남는 것. 그것이 진짜 나다.
제물론편에 있는 말을 하나 더 옮겨 둔다.
天地與我並生 而萬物與我為一. 하늘과 땅이 나와 함께 살고, 만물이 나와 하나다.
혼자 이 세상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아플 때 하늘과 땅도 제 나름의 비바람을 겪고 있고, 내가 고요할 때 만물도 각자 제 길을 돌고 있다. 나는 그 전체의 일부다. 처음부터 혼자였던 적이 없다.
더 나은 자기가 될 필요는 없다. 애초에 온전한 채로 태어났다.
잘린 회사, 떠나는 배우자, 아픈 아버지, 못 막은 카드값. 이것들을 다 안고 오늘 아침에도 눈을 뜨고 숨을 쉬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상당한 일을 한 것이다.
자여는 굽은 몸으로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소식은 젖은 채로 들길을 걸었다. 두 사람 다 비를 피하지는 못했다.
그 나무의 그루터기에서 새순이 올라오는 것을, 나무 자신은 봄이 오기 전까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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