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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모은 돈을 자기가 쓰지 못한 부부

당나라가 저물어 가던 무렵, 촉 땅에 이씨 성을 가진 늙은 부부가 살았다.

아들이 없었다.

평생 아끼고 모아서 십만 전을 쌓았다. 반찬 한 가지 더 올리는 것도 아까워하던 사람들이다.

그러다 어느 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평생 벌기만 하고 누린 게 없소. 물려줄 사람도 없고. 나이도 이만큼 먹었으니, 이제 조금은 써 봐도 되지 않겠소."

그래서 돈을 조금 꺼내 술과 고기를 샀다. 십만 전 가운데 아주 조금.

그날 밤 부부는 같은 꿈을 꾸었다.

금빛 갑옷을 입은 신장이 나타나 호통을 쳤다.

"이것은 촉왕의 돈이다. 하늘은 너희에게 지키라고 맡겼을 뿐인데, 무슨 자격으로 꺼내 쓰느냐."

술 한 병, 고기 몇 근에 갑옷 입은 신장이 출동했다. 창고지기가 창고 물건을 꺼내 먹다 걸린 셈이다.

게다가 그 무렵 촉에는 아직 촉왕이 없었다. 하늘은 주인이 도착하기도 전에 명의 정리부터 끝내 둔 것이다.

부부는 놀라 깨어났고, 남은 돈을 다시 묶어 두었다. 그 뒤로는 한 푼도 손대지 않았다.


얼마 뒤 왕건이 군대를 이끌고 성도를 차지했다. 고려를 세운 왕건과 이름만 같은 사람이다.

새로 들어온 주인은 돈이 모자랐다. 군사를 먹이고 성을 다스리는 데 들어갈 곳이 끝이 없었다.

그때 이씨 노인이 찾아와 재산을 바치겠다고 했다.

왕건은 의아했다. 자신은 밖에서 쳐들어온 사람이다. 성도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거나 미워했으면 했지, 제 발로 돈을 들고 올 까닭이 없었다.

"갚고 싶은 원수가 있는가. 그렇다면 내가 갚아 주겠다. 벼슬이 필요한가. 그것도 주겠다."

노인이 답했다.

"둘 다 아닙니다. 꿈을 꾸었는데, 이 돈은 받을 사람에게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왕건은 크게 기뻐했다.

"그렇다면 나도 그냥 받지는 않겠다. 내가 촉왕이 되거든 너희 이름을 뒷세상에 남겨 주겠다."

훗날 왕건은 전촉을 세워 첫 임금이 되었고, 약속을 지켰다.

이씨 부부의 집 앞 골목에 '이십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부부의 성이고, 십은 그 십만 전의 십이다.


돈이 있다는 것과 돈이 내 것이라는 것

명리에서 재성(財星)은 일간(日干)이 극하는 오행이다. 내가 다스리고 부리는 대상이다.

그런데 판에 재성이 있다고 해서 그 돈이 곧 내 것은 아니다. 재성이 있는 것과 재성을 쓸 수 있는 것은 따로 움직인다.

적천수(滴天髓)에 이런 구절이 있다.

何知其人貧 財神反不眞

어떻게 그 사람이 가난한 줄 아는가. 재성이 도리어 참되지 않기 때문이다.

재성이 눈앞에 쌓여 있어도 참되지 않으면, 그 돈은 지나가는 돈이거나 맡아 둔 돈이다.

이씨 부부는 십만 전을 가진 부자였다. 그리고 평생 가난한 사람처럼 살았다. 두 가지가 한 집 안에서 아무 문제 없이 함께 지냈다.

맡아 둔 돈이 되는 판에는 몇 가지 모양이 있다.


첫째, 열리지 않는 창고

진(辰), 술(戌), 축(丑), 미(未) 네 글자는 창고다. 이 가운데 재성의 오행을 품고 있는 글자를 재고(財庫)라 부른다.

병화(丙火) 일간을 예로 들면, 재성은 금(金)이고 금의 창고는 축토(丑土)다. 병화 일간의 판에 축이 앉아 있으면 재고를 가진 셈이다.

창고는 모으는 데 능하다. 들어온 것을 흘리지 않는다.

그런데 문이 잠겨 있다. 충(沖)을 만나야 열린다. 축을 여는 글자는 미(未)다.

원국의 창고가 잠긴 채로 평생을 가면, 모으기만 하고 쓰지 못한다. 쓰려고 하면 몸이 먼저 불편해진다. 지갑을 열다 말고 다시 닫는다.

이씨 부부의 창고를 연 것은 부부 자신이 아니었다. 바깥에서 쳐들어온 군대였다.

원국과 대운(大運)이 안에서 움직이는 힘이라면, 해마다 들어오는 류년(流年)은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힘이다. 안에서 평생 못 열던 자물쇠가 밖에서 오는 충 한 번에 풀리는 일이 있다.

다만 그렇게 열린 창고의 돈은 대개 문을 연 쪽으로 흘러간다.


둘째, 자기를 먹이지 못하는 판

식신(食神)은 먹을 식 자를 쓴다. 먹고 마시고 누리는 기운이다.

재물이 들어오는 길 가운데 가장 편안한 길이 식신생재(食神生財)다. 누리고 즐기는 가운데 돈이 생기고, 그 돈으로 다시 누린다. 돈과 몸이 한 살림을 한다.

식신이 없는 판, 또는 편인(偏印)이 식신을 쳐서 눌러 버린 판은 사정이 다르다.

편인이 식신을 치는 것을 효신탈식(梟神奪食)이라 한다. 밥그릇을 올빼미가 채 간다는 이름이다. 편인과 식신은 음양이 같아서, 편인이 식신을 칠 때는 에누리 없이 곧장 친다.

이런 사람은 벌 줄은 알아도 자기를 먹일 줄은 모른다. 술 한 잔, 고기 한 점에도 마음 한구석이 켕긴다. 남이 사 주는 밥은 편한데, 제 돈으로 사 먹는 밥은 목에 걸린다.

이씨 부부가 평생 처음 제 돈을 헐어 산 것이 술과 고기였다.

평생 닫혀 있던 식신의 문을 처음 열어 본 날, 그 문 앞에 신장이 서 있었다.


셋째, 재성이 관살(官殺)로 흐르는 판

재성은 관살을 낳는다. 이를 재생관(財生官)이라 한다.

돈은 결국 자리와 권세와 이름 쪽으로 흘러간다. 세금이 그렇고, 나라에 바치는 돈이 그렇고, 윗사람에게 가는 돈이 그렇다.

남자의 판에서 이 흐름은 집안 이야기이기도 하다.

정재(正財)는 아내요, 칠살(七殺)은 아들이며, 정관(正官)은 딸이다. 재성이 관살을 낳는 흐름은 곧 아내가 자식을 낳는 흐름이다.

이씨 부부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재성이 집 안에서 낳아 기를 관살이 없었다.

그래서 십만 전은 집 밖의 관을 찾아 나섰다. 그 관이 성도의 새 주인이었다.

재성이 관을 살리면, 관은 이름으로 갚는다. 관은 자리이고, 체면이며,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이다.

이씨 부부는 돈을 내주고 골목 하나를 이름으로 받았다. 천백 년이 넘도록 그 이름이 이야기 속에 남아 있다.

아들에게 물려줬다면 삼대쯤 가서 흩어졌을 돈이, 임금에게 가서 골목 이름으로 굳었다.


쌓는 돈과 흐르는 돈

정재는 차곡차곡 쌓는 돈이다. 꾸준하고, 성실하고, 계획이 있다. 한 번 들어온 것은 잘 나가지 않는다.

편재(偏財)는 돌고 흐르는 돈이다. 크게 들어오고 크게 나간다. 제 주머니보다 남의 돈을 굴리는 자리에 가깝다.

이씨 부부의 십만 전은 정재의 돈이었다. 한 푼 한 푼 아껴서 모은 돈이다.

왕건의 손에 들어간 뒤로는 편재의 돈이 되었다. 군사를 먹이고 나라를 세우는 데 한꺼번에 풀려나갈 돈이다.

같은 십만 전이 두 사람의 손을 거치며 성질이 바뀌었다. 한쪽에서는 쌓이는 돈이었고, 다른 쪽에서는 흐르는 돈이었다.

부부는 쌓는 일을 맡았고, 왕건은 푸는 일을 맡았다. 신장이 부부를 두고 지키는 사람이라 한 것은, 그 역할을 두고 한 말이었다.


오늘의 창고지기들

평생 아끼기만 하다가 말년의 병원비로 고스란히 내놓는 사람이 있다.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모았는데, 자식들 다툼 속에 흩어지는 집이 있다.

노후를 위해 쌓았는데, 정작 노후에 쓸 줄을 몰라 통장만 늙어 가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들의 돈이 모두 촉왕의 돈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판을 펴 보면 액수보다 먼저 보이는 것이 있다. 창고가 잠겨 있는지, 식신이 눌려 있는지, 재성이 어디를 향해 흐르는지.

이씨 부부가 그날 밤 꿈을 꾸지 않았다면, 십만 전은 술과 고기로 조금씩 사라졌을까. 아니면 어차피 성도에 들어온 군대의 손에 넘어갔을까.

어느 쪽이든, 골목에 이름이 붙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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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答 1
  • 익명.·

    감사합니다. 신식없이 편인만 있어서 스스로에게 돈쓰는게 이리 불편한가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