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아파야 쉴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일요일 약속을 취소하려고 메시지를 쓴다.
“오늘은 좀 쉬고 싶어서.”
읽어보니 이유가 약한 것 같다.
다들 피곤한데 나만 유난인가 싶다.
지운다.
“몸이 좀 안 좋아서.”
이번에는 보낸다.
답장이 온다.
“그럼 쉬어. 무리하지 말고.”
그제야 마음이 편해진다.
사실 거짓말도 아니다.
피곤하고, 머리도 무겁고, 아무하고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쉬고 싶다는 말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아프다고 해야 허락이 날 것 같았다.
어떤 사람에게 몸의 불편함은, 자기 시간을 돌려받을 때 내미는 증빙이 된다.
평소에는 잘 거절하지 않는다.
부탁받으면 일단 알겠다고 한다.
일정을 바꾸면 어떻게든 맞춘다.
기분 나쁜 말을 들어도 웃고 넘어간다.
그러다 혼자 있을 때 생각한다.
왜 또 한다고 했지.
이번에는 안 하려고 했는데.
그런 사람에게 누군가 말한다.
“네가 너무 참아서 몸이 아픈 거야.”
위로하려고 한 말일 수 있다.
그런데 듣는 사람에게는 숙제가 하나 더 생긴다.
몸 관리도 못 했는데.
성격 관리까지 잘못했구나.
아픈 것만으로도 피곤한데, 살아온 태도까지 반성하게 된다.
스트레스는 수면이나 몸의 긴장, 통증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반복되는 증상을 전부 억눌린 감정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 증상이 지속되면 진료를 통해 살펴야 한다.
입안이 헐었다고 삼킨 말이 원인이라고 정할 수는 없다.
거절을 잘한다고 감기에 안 걸리는 것도 아니다.
몸의 원인을 살피는 일과, 생활에서 줄일 부담을 찾는 일은 함께 할 수 있다.
명리에서 관살(官殺)은 나를 제약하는 힘이다.
생활에서는 책임과 요구, 지켜야 할 기준으로 연결해볼 수 있다.
관살이 쓰임을 얻으면 역할과 질서를 만든다.
하지만 요구가 커지는 만큼 일간을 받쳐주는 조건이 있는지도 보아야 한다.
할 일이 있다는 것과, 그 일을 계속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르다.
인성(印星)은 일간을 생하고 받쳐주는 작용이다.
관살의 기운이 인성으로 이어져 일간을 돕는 관인상생·살인상생에서는 압박을 받아낼 지식과 보호, 지원의 역할을 생각해볼 수 있다.
생활에서도 책임만 더 주는 것과, 그 책임을 수행할 여건까지 마련해주는 것은 다르다.
사람을 보충해준다.
배울 시간을 준다.
쉬는 동안 대신 맡을 사람이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지원 대신 칭찬이 올 때가 있다.
“역시 믿을 사람은 너밖에 없어.”
믿어주는 것은 고맙다.
그런데 믿음으로 야근 시간을 나눠 가질 수는 없다.
책임감 있는 사람일수록 그 말을 받고 자기 시간을 더 내놓는다.
그러다 몸이 안 좋아져야 겨우 멈춘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당장 모든 관계를 끊는 결심까지는 아닐 것이다.
“이번 주에는 맡기 어렵습니다.”
“그 일까지 하려면 기존 일정부터 조정해야 합니다.”
몸이 망가졌다는 증명 대신, 현재 가능한 범위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말한다고 상대가 반길 리는 없다.
아쉬워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구해야 하니 귀찮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 불편함을 없애주려고 내 일정에 없는 시간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쉬는 날에도 비슷하다.
특별한 약속이 없다고 시간이 남는 것은 아니다.
혼자 있고 싶은 것도 그날의 계획일 수 있다.
소파에 누워 있는 사진까지 보내며 휴식의 정당성을 심사받을 필요는 없지 않나.
예약한 병원이 있어야만 중요한 일정은 아니다.
다음 주말, 다시 연락이 온다.
“일요일에 시간 되지?”
잠깐 고민한다.
이번에는 몸이 안 좋다는 말을 먼저 쓰지 않는다.
“이번 주는 집에서 쉬려고. 다음에 보자.”
답장이 바로 오지는 않는다.
괜히 설명을 더 붙이고 싶다.
그래도 그대로 둔다.
그날 오후에는 낮잠을 잔다.
일어나니 몸이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다.
밀린 일도 그대로다.
다만 오늘은 쉬기 위해, 어디가 아픈지부터 찾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