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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치는게 본업인 공무원들

점 치는 공무원이 있었다. 농담이 아니다. 출근해서 거북 등껍질에 불을 지지고, 갈라진 금을 읽고, 보고서를 올리는 것이 업무였다. 월급을 받고, 품계가 있고, 상사가 있었다. 오늘날 기상청 직원이 일기예보를 하듯, 그 사람들은 나라의 앞날을 점으로 읽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은(殷)나라, 그러니까 상(商)나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13세기, 무정(武丁) 왕 시대에 이미 이름이 남아 있는 전문 점관이 120명이 넘는다. 이 사람들을 정인(貞人)이라 불렀다. 정(貞)은 점을 친다는 뜻이다.

방법은 갑골복(甲骨卜)이다. 소의 어깨뼈나 거북의 배딱지를 다듬어 구멍을 파고, 뜨거운 불씨를 갖다 대면 T자 모양으로 금이 갈라진다. 그 금의 방향과 모양을 읽어서 길흉을 판단한다.

무엇을 물었을까. 갑골문(甲骨文) 기록을 보면 전쟁, 제사, 농사, 날씨, 사냥, 출산, 질병, 꿈, 성읍 건설. 왕의 치통이 낫겠는지까지 점을 쳤다. 국가 대사부터 왕의 잇몸까지, 정인이 거북 등껍질 앞에 앉으면 못 물을 것이 없었다.

점을 친 뒤에는 날짜, 정인의 이름, 질문 내용, 점의 결과, 그리고 나중에 실제로 어떻게 되었는지까지 뼈에 새겨 넣었다. 기록을 남긴 것이다. 단순한 미신 행위가 아니라 체계적인 행정 절차였다.

주(周)나라에 오면 술수의 종류가 크게 늘어난다. 주례(周禮)에 점복(占卜) 관련 관직이 줄줄이 나온다.

맨 위에 태복(太卜)이 있다. 국가 점복의 총책임자다. 태복이 관장한 술수는 크게 세 갈래다. 첫째, 삼조(三兆)라 하여 세 가지 거북점 체계. 갑골복의 후신이다. 둘째, 삼역(三易)이라 하여 세 가지 시초점(蓍草占) 체계. 연산(連山), 귀장(歸藏), 주역(周易)인데, 연산과 귀장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주역(周易)만 살아남아 동양 역학의 뿌리가 되었다. 셋째, 삼몽(三夢)이라 하여 세 가지 꿈 해석 체계다.

시초점은 시초(蓍草) 50개비를 나누고 세고 걸치는 과정을 18번 반복해서 6개의 효(爻)를 얻고, 이것으로 64괘 중 하나를 뽑아 길흉을 판단하는 방법이다. 거북점이 뼈의 갈라진 금을 보는 것이라면, 시초점은 풀대의 숫자를 세는 것이다. 도구는 달라도 목적은 같다.

태복 밑에는 실무진이 있었다. 복사(卜師)는 거북점을 집행하고, 귀인(龜人)은 거북을 품종별로 관리했으며, 서인(筮人)은 시초점을 담당했다. 점인(占人)은 점의 결과를 해석하면서 해마다 적중률 통계까지 냈다. 점몽(占夢)이라는 관직도 있었는데, 꿈을 여섯 종류로 분류하여 해석하는 전문가였다.

무엇을 물었는가. 팔명(八命)이라 하여 여덟 가지로 정해져 있었다. 전쟁, 하늘의 이변, 영토와 봉록, 국가 정책, 일의 성패, 사람이나 물건의 도착 여부, 비, 그리고 병이 나을지 여부. 나라를 경영하면서 판단이 필요한 거의 모든 사안이 점의 대상이었다.

좌전(左傳)에 실제 사례가 나온다. 진(晉)나라의 필만(畢萬)이 위(魏) 땅을 봉토로 받을 때, 점관이 시초점을 쳐서 둔(屯) 괘 변 비(比) 괘를 얻었다. "후손이 크게 번성하겠다"는 해석이었고, 실제로 필만의 후손이 위(魏)나라를 세웠다. 중이(重耳), 훗날의 진 문공(晉文公)이 망명 중일 때도 시초점을 쳐서 "돌아가면 패자(霸者)가 될 것"이라 했고, 그대로 되었다. 국가 중대사의 공식 절차에 시초점이 들어가 있었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한(漢)나라에 오면 술수의 종류가 한 번 더 늘어난다. 태사령(太史令) 밑에 태복서(太卜署)가 있었는데, 여기서 공식적으로 다룬 점법이 네 가지다. 귀복(龜卜), 오조(五兆), 역괘(易卦), 그리고 식점(式占).

귀복은 거북점, 역괘는 시초점으로 앞 시대에서 이어진 것이다. 새로 등장한 것이 식점(式占)이다. 식반(式盤)이라는 도구를 쓰는데, 둥근 천반(天盤)과 네모난 지반(地盤)을 겹쳐 만든 원반이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그대로 도구로 만든 것이다. 천반에는 북두칠성과 12지(支)가 새겨져 있고, 지반에는 고정된 방위와 28수(宿)가 새겨져 있다. 점을 치는 시각과 절기에 맞춰 천반을 돌리고, 천반과 지반의 위치 관계에서 사과(四課)를 뽑고, 다시 그 안에서 삼전(三傳)을 구성해서 길흉을 판단한다. 이것이 뒤에 육임(六壬)으로 정리되는 술수의 원형이다. 한나라 무덤에서 옻칠한 목제 식반이 여러 점 출토되었다.

한나라에서 새로 등장한 술수가 두 가지 더 있다. 풍각점(風角占)과 망기(望氣)다.

풍각점은 높은 곳에 5장(약 15미터) 길이의 장대를 세우고 닭 깃털을 매달아,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관측하는 것이다. 바람이 부는 방향(팔방)과 시간(어느 절기, 하루 중 어느 때)을 종합하고, 바람 소리의 높낮이를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오음(五音)에 대응시켜 길흉을 판단했다. 정월 초하루와 팔절(八節, 입춘부터 동지까지)에 부는 바람을 특히 중시했다. 무엇을 점쳤느냐. 전쟁과 반란의 조짐, 가뭄과 홍수, 그해 농사의 풍흉, 곡물 값의 등락이다. 군사 행동의 시기를 잡는 데 실용적으로 쓰였다.

망기(望氣)는 구름의 모양과 색깔을 보는 것이다. 특정한 기운이 특정 인물이나 장소 위에 서린 것을 읽어서 판단한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있다. 항우의 책사 범증이 사람을 보내 유방의 기운을 살피게 했더니, "모두 용과 호랑이의 형상이고 오색(五色)을 이루니, 이것은 천자의 기운이다"라고 보고했다. 범증은 이 결과를 근거로 항우에게 유방을 즉시 제거하라고 두 차례나 권고했다. 항우가 듣지 않았고, 결국 유방이 천하를 얻었다. 홍문연(鴻門宴) 사건의 배경에 망기가 있었던 것이다.

한나라 때 또 하나 중요한 인물이 경방(京房)이다. 전한 말, 기원전 77년에 태어난 역학자로, 납갑법(納甲法)을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 육효(六爻)의 원형이다. 64괘를 8개의 궁(宮)으로 나누고, 각 효(爻)에 천간과 지지를 배당하고, 배당된 오행과 궁의 오행 사이의 생극(生剋) 관계를 따져서 육친(六親)을 부여하는 체계다. 경방은 이 틀을 개인의 길흉이 아니라 국가 정책에 썼다. 가뭄, 홍수, 일식 같은 재이(災異)를 괘상으로 풀어서 "이 재이가 무엇을 경고하는가"를 임금에게 올렸다. 관리 인사가 잘못되었다, 외척이 전횡하고 있다, 이런 내용을 역괘를 근거로 간언한 것이다.

당(唐)나라에 오면 점복 기관이 사천대(司天臺)로 바뀌면서 술수가 체계적으로 정리된다. 이 시기에 삼식(三式)이라는 틀이 확립된다.

삼식은 태을(太乙), 육임(六壬), 기문둔갑(奇門遁甲)이다. 세 가지 술수가 각각 다른 영역을 맡았다. 태을은 국운과 천재지변을 물을 때 쓴다. 남제서(南齊書)에 태을구궁점(太乙九宮占)으로 실제 역사 사건을 대응시킨 기록이 13건 남아 있는데, "한고조 5년, 태을이 4궁에 있어 주객이 모두 길하니 고조가 초(楚)를 격파했다"는 식이다. 육임은 인사(人事)의 성패를 물을 때 쓴다. 한나라 때의 식반(式盤)을 발전시킨 것으로, 점을 치는 시각과 월장(月將)과 일진(日辰)을 조합해서 천지반도(天地盤圖)를 만들고 인사의 길흉을 풀어낸다. 기문둔갑은 군사 작전의 방향과 시기를 잡을 때 쓴다.

국운이 궁금하면 태을을 펼치고, 사람 사이의 일이 궁금하면 육임을 돌리고, 군대를 어느 방향으로 보낼지가 궁금하면 기문둔갑을 놓았다. 사천대의 실무진은 이 세 가지를 모두 다룰 수 있어야 했다.

당나라에서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이허중(李虛中)이라는 인물이다. 기원전이 아니라 서기 761년에 태어난 사람이다. 이 사람이 태어난 해, 달, 날의 간지(干支), 그러니까 년주(年柱), 월주(月柱), 일주(日柱) 세 기둥만으로 사람의 길흉을 추단하는 방법을 만들었다. 한유(韓愈)가 "백에 한둘밖에 틀리지 않는다"고 극찬한 기록이 남아 있다. 아직 시주(時柱)는 없는 "삼주(三柱)" 단계다. 이것이 오늘날 사주명리(四柱命理)의 직접적 원형이다.

송(宋)나라에 오면 술수의 황금기라 할 만하다. 사천감(司天監)이 공적 점복을 맡았고, 민간에서는 걸출한 술수가들이 잇따라 나왔다.

경방의 납갑법을 계승해서 육효(六爻) 점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화주림법(火珠林法)이다. 마의도자(麻衣道者)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세응(世應)과 육친(六親) 배치를 표준화했다. 오늘날 육효를 칠 때 쓰는 그 틀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소옹(邵雍)이라는 사람은 매화역수(梅花易數)를 만들었다. 시초 50개비를 세는 번거로운 절차 없이, 시간이나 숫자나 눈앞에 보이는 사물에서 바로 괘를 뽑아내는 방법이다. 상괘(上卦)는 연월일의 합을 8로 나눈 나머지, 하괘(下卦)는 여기에 시(時)를 더해 8로 나눈 나머지, 동효(動爻)는 총합을 6으로 나눈 나머지. 그리고 체괘(體卦)와 용괘(用卦)의 오행 생극 관계로 길흉을 판단한다. "정해진 법이 없다(法無定法)"는 것이 매화역수의 원칙이다. 눈앞의 모든 것이 괘가 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자평(徐子平)이다. 이허중의 삼주(三柱)에 시주(時柱)를 더해서 사주팔자(四柱八字)를 완성했다. 태어난 해, 달, 날, 시각을 각각 간지 두 글자씩으로 표기하면 총 여덟 글자. 이것이 팔자(八字)다. 연해자평(淵海子平)이라는 책으로 후대에 전해졌다. 오늘날 사주를 보는 모든 방법의 출발점이 여기다.

다만 이 술수들이 전부 관방(官方)에서 쓰인 것은 아니다. 삼식과 택일은 사천감의 공적 업무였지만, 화주림법이나 매화역수, 사주명리는 민간에서 발전하여 퍼져 나간 것이다. 관(官)과 민(民)에서 동시에, 그러나 다른 방향으로 술수가 자라난 시대였다.

송 태종은 민간의 술수를 경계했다. 976년에 민간에서 천문 술수를 배우는 자를 전부 잡아들이고, 숨기면 사형에 처하고, 밀고하면 30만 전을 상으로 줬다. 하늘을 읽는 일은 국가가 독점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천감과는 별도로 한림천문원(翰林天文院)이라는 기관을 만들어, 사천감의 결과를 따로 검증하게 했다. 점 치는 기관을 감시하는 기관까지 둔 것이다.

명(明)나라부터는 흠천감(欽天監)이라는 이름이 정착되어 청(清)나라 말까지 이어졌다.

흠천감에서 가장 실용적으로 쓴 술수는 택일(擇日)이다. 황제의 즉위식, 대혼례, 친경(親耕), 제사, 출정, 능묘 공사 착공, 궁중 옷을 처음 꺼내 입는 날까지, 전부 흠천감이 날을 잡았다. 택일 방법은 총진택일법(叢辰擇日法)이라 불리는 체계로, 오행 신살(神煞)과 시진(時辰)의 관계를 분석해서 길흉을 판단하는 것이다. 건제십이직(建除十二直), 28수(宿)의 길흉, 황도길일(黃道吉日)과 흑도흉일(黑道凶日)의 판별을 종합했다. 해마다 이듬해의 길흉일을 정리한 시헌서(時憲書)를 편찬하여 전국에 반포했는데, 민간에서도 이 역서를 보고 혼인이나 이사 날짜를 잡았다. 청 도광제(道光帝)의 여섯째 아들 혁흔(공친왕)의 혼례 날짜가 흠천감의 총진택일법으로 결정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풍수(風水) 감정도 흠천감 소관이었다. 능묘의 자리를 잡을 때 산세의 용맥(龍脈)을 살피고, 수구(水口)의 방향을 따지고, 좌향(坐向)을 정했다. 자금성의 자리를 잡은 것도 흠천감이고, 명십삼릉의 자리를 잡은 것도 흠천감이다.

명나라 건국 공신 유기(劉基), 세상에서 유백온(劉伯溫)이라 부르는 사람이 기문둔갑으로 군사 전략을 짰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파양호(鄱陽湖) 전투에서 화공 시점을 기문둔갑으로 잡았다, 주원장의 즉위 길일을 기문둔갑으로 택했다, 하는 이야기들이다. 다만 이것은 후대 전승이지 정사(正史)의 기록이 아니다. 제갈량의 공성계(空城計)나 장량의 활약상처럼, 뛰어난 전략가에게 술수의 신비를 덧씌우는 것은 동아시아의 오래된 습관이다.

흠천감의 가장 극적인 이야기는 청나라 때 벌어진다. 독일 예수회 선교사 탕약망(湯若望)이 흠천감 감정(監正)이 되었는데, 그가 만든 시헌력(時憲曆)이 기존 역법보다 정확했기 때문이다. 20년쯤 지나자 양광선(楊光先)이라는 사람이 "서양 오랑캐의 사교를 퍼뜨린다"며 탄핵하여 역옥(曆獄) 사건이 터졌고, 탕약망은 투옥되었다. 양광선이 흠천감을 맡았으나 역법 계산이 엉망이 되었다. 결국 어린 강희제(康熙帝)가 양광선 측과 서양 역법 측을 불러다 놓고 해 그림자 관측 대결을 시켰다. 서양 역법 측의 완승이었다. 강희제는 양광선을 파면하고 벨기에 출신 페르비스트에게 흠천감을 맡겼다. 택일과 풍수 같은 술수를 관장하는 관청의 수장에 유럽 사람이 앉았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일이다.

한국도 다르지 않았다. 고려에는 서운관(書雲觀)이 있었고, 조선에서 관상감(觀象監)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 서운관이 쓴 술수는 꽤 다양하다. 고려사에 기록된 것을 보면, 점구(茭 교배라고 현재도 도교에서 하늘의 뜻을 물을때 많이 사용)를 던지는 방법이 있었다. 점구란 반달 모양의 나무 두 쪽을 던져서 앞뒤 조합으로 길흉을 보는 것이다. 주역점(周易占)도 쳤고, 관상(觀象)으로 하늘의 이변을 풀이하는 것도 있었고, 꿈을 해석하는 몽점(夢占)도 공식 점복의 한 종류였다. 사용한 점서(占書)로는 개원점경(開元占經), 경방역전(京房易傳), 비기(秘記) 같은 것들이 기록에 남아 있다.

무엇을 물었는가. 현종 2년(1011년) 거란이 침입했을 때 사절을 보낼지 말지를 점으로 물었다. 인종 4년(1126년) 금나라에 사대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점으로 물었다. 고종 8년(1221년) 몽골이 물품을 요구해 왔을 때 들어줄 것인지를 점으로 물었다. 공민왕 6년(1357년) 한양으로 도읍을 옮길지 말지를 점으로 물었다. 전쟁, 외교, 천도. 나라의 흥망이 걸린 사안마다 서운관이 점구를 던지거나 괘를 뽑아 답을 올렸다.

조선의 관상감은 천문학, 지리학(풍수), 명과학(命課學)의 세 분야를 관장했다. 이 중에서 점복 술수가 집중된 곳이 명과학이다.

명과학은 두 영역으로 나뉘었다. 녹명(祿命)은 사람의 타고난 복록과 수명을 예측하는 것이고, 복서(卜筮)는 특정 사안의 길흉과 성패를 예측하는 것이다. 관원을 뽑는 시험인 음양과(陰陽科)의 명과학 과목을 보면, 이 사람들이 어떤 술수를 공부해야 했는지가 나온다.

녹명 쪽 시험 서적은 원천강(袁天綱), 서자평(徐子平), 응천가(應天歌), 범위수(範圍數)였다. 서자평이 시험 과목에 들어 있다는 것은, 관상감 관원이 사주명리(四柱命理)를 공식적으로 공부해야 했다는 뜻이다. 복서 쪽 시험 서적은 육임(六壬), 주역(周易), 황극경세(皇極經世)였다. 택일 서적으로는 극택통서(剋擇通書)가 있었다.

특히 육임(六壬)은 세종 12년(1430년)에 정식 시험 과목으로 채택된 뒤, 조선 전기와 후기를 통틀어 명과학 관리 선발의 핵심 술수로 쓰였다. 영조 17년(1741년)에는 육임 교재인 육임과경(六壬課經)과 육임단경(六壬斷經)을 관상감용으로 다시 간행하라는 왕명까지 내려졌다. 국가가 특정 술수의 교재를 직접 찍어서 보급한 것이다.

택일(擇日)은 관상감의 일상 업무 중 가장 빈번한 것이었다. 국장(國葬)의 날짜, 산릉(山陵)의 역사 시작일, 왕의 혼인 날짜, 즉위식 날짜, 궁궐 공사 시작일까지 전부 관상감이 택일단자(擇日單子)라는 공문서를 올려서 결정했다. 한 사안에 대해 여러 날짜를 올리면 왕이 그 중에서 고르는 방식이었다.

풍수는 지리학 분야에서 담당했다. 왕릉의 자리를 잡고, 궁궐의 위치를 정하고, 도읍의 지세를 살피는 것이 전부 관상감 소관이었다.

조직 규모가 만만치 않았다. 전체 인원이 약 215명이고, 생도만 60명이었다. 관원을 뽑는 과거 시험인 음양과에서 천문학 5명, 지리학 2명, 명과학 2명을 선발했다. 시험 과목이 천문학, 풍수, 사주명리, 육임, 주역, 택일이었다. 성적에 따라 1등은 종8품, 2등은 정9품, 3등은 종9품에 임명되었다. 점을 치는 공무원을 시험으로 뽑고, 성적순으로 품계를 매긴 것이다.

동양만 그랬을까. 고대 로마에도 아우구르(augur)라는 관직이 있었다. 아우구르의 술수는 하늘과 새와 짐승의 행동에서 신의 뜻을 읽는 것이었다.

관찰하는 징조는 다섯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첫째, 하늘의 징조. 천둥과 번개의 방향을 본다. 왼쪽에서 치면 대체로 길조, 오른쪽이면 흉조. 둘째, 새의 징조. 독수리의 비행 방향을 보는 것과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으로 나뉘었다. 셋째, 신성한 닭의 징조. 마르스에게 바쳐진 닭에게 모이를 주어 게걸스럽게 먹으면 길조, 안 먹으면 흉조. 넷째, 네발짐승의 행동. 다섯째, 피의 비나 조각상의 눈물 같은 예기치 않은 이변.

아우구르가 점을 칠 때는 리투우스(lituus)라 불리는 끝이 굽은 지팡이로 하늘과 땅에 정사각형 경계를 긋고, 이 안에서 관측된 징조만 공적 효력이 있었다. 이 공간을 템플룸(templum)이라 불렀다. 원로원 회의, 선거, 군사 출정, 도시 건설, 모든 국가 행위 앞에 이 절차가 선행되었다.

기원전 249년, 집정관 풀케르가 카르타고와의 해전을 앞두고 닭에게 모이를 줬는데, 닭이 먹지 않았다. 풀케르는 "먹기 싫으면 마시게 해라"라며 닭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해전은 참패로 끝났고, 풀케르는 신성모독죄로 재판에 넘겨졌다. 키케로는 아우구르이면서 점복론(De Divinatione)에서 점의 초자연적 효력을 사실상 부정한 사람인데, 그러면서도 "국가가 성급한 행동을 멈추고 숙고할 수 있게 하는 장치로서는 유용하다"고 했다. 점 치는 공무원이면서 점을 안 믿은 것이다. 하지만 제도의 가치는 인정했다.

더 멀리 가면 메소포타미아의 바루(bārû)가 있다. 기원전 2천 년경 바빌로니아의 전문 점관이다. 바루의 핵심 술수는 간점(肝占)이다. 제물로 바친 양의 간을 꺼내 그 모양과 색깔로 신의 뜻을 읽었다.

양의 간을 꺼내면 표면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훑어가며 갈라진 금, 혹, 변색 부위를 읽었다. 이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문서가 바루투(bārûtu)라는 총서인데, 점토판 약 100매에 8,000개가 넘는 점괘가 실려 있다. 1,500년에 걸쳐 축적된 관찰 기록이다. 바루를 교육할 때는 진흙으로 양의 간 모형을 빚어 교보재로 썼는데, 대영박물관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표면이 55개 구획으로 나뉘어 있고 각 구획에 해석 기준이 새겨져 있다. 매뉴얼이 간 위에 직접 새겨진 것이다.

간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물 위에 기름을 떨어뜨려 퍼지는 모양을 읽는 기름점, 유향을 태워 연기의 흐름을 관찰하는 향점도 있었다. 연기가 오른쪽으로 흐르면 적에 대한 승리, 두 갈래로 갈라지면 정신적 쇠약, 뭉쳐서 오르면 금전적 이득. 해석 기준이 세밀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현대에도 여전히 도교나 출마선 같은 계열은 향으로 점을 봅니다. 갖춰진 체계가 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명이 국가 단위로 커지면 점도 국가 시스템이 되었다. 갑골복에서 시초점으로, 시초점에서 육효와 육임으로, 육임에서 삼식으로, 그리고 사주명리와 택일과 풍수까지. 술수는 시대마다 갈라지고 합쳐지고 세분화되면서, 국가가 관리하는 기술 체계로 발전했다.

관청이 있고, 관직이 있고, 매뉴얼이 있고, 시험이 있고, 교재를 국가가 직접 찍어 보급하기까지 했다. 개인이 궁금해서 치는 점이 아니라, 나라의 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조달하는 행정 행위였다.

지금은 그 자리에 기상청이 있고, 국가정보원이 있고, 통계청이 있다. 하는 일의 본질은 같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정보를 모아서 의사결정자에게 올리는 것. 도구가 거북 등껍질에서 슈퍼컴퓨터로 바뀌었을 뿐이다.

바뀐 게 도구뿐인지, 아니면 뭔가 더 바뀐 건지는 각자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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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염화소녀_(구)남궁현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