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학을 조금 아는 사람이 친구를 함부로 사귀지 않는 이유
현학을 조금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친구가 적다.
성격이 나빠서 그런 것은 아니다. 물론 성격이 나쁜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다른 이유다. 남들이 보지 않는 것을 하나 더 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은 친구를 볼 때 얼굴을 본다. 말을 듣고, 밥값을 누가 내는지를 본다. 현학을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들고 들어온 기운을 본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본다.
풍수를 배운 사람은 이것을 안다. 집터를 볼 때 산과 물을 따지지만, 실제로 당신에게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은 산도 물도 아니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다.
하루 여덟 시간을 같은 사무실에서 보내는 동료, 밤마다 잔을 부딪히는 친구, 한 이불을 덮는 배우자. 이들이 당신의 산이고 물이다. 이사를 백 번 해도 이 사람들을 그대로 데려가면 풍수는 바뀌지 않는다.
산이 무너져 있고 물이 썩어 있으면 그 집은 아무리 방향을 잘 잡아도 소용이 없다. 사람도 같다.
명리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볼 때 쓰는 말이 몇 가지 있다. 합(合)과 충(沖), 형(刑), 해(害)
궁합 볼 때 나오는 말들인데, 이 중 해라는 것이 있다. 서로 마주 보면 이유 없이 미운 관계다. 싸운 적도 없고 빚진 것도 없는데, 같은 자리에 있으면 피곤하다. 그 사람이 말을 하면 내가 지치고, 내가 말을 하면 그 사람이 삐딱하게 받는다. 그리고 원진살도 비슷한 개념인데, 한국에서 흔히 쓰는 원진과 진짜 원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옛사람들은 이것에 원망과 성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원(元)은 원망이고 진(嗔)은 성냄이다. 이름부터가 노골적이다. 좋게 포장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 원진이 종이 위의 사주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 사이에도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과 오래 붙어 있으면, 원래 내 사주에 없던 원망과 성냄이 내 안에서 자라난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 사람 옆에만 있으면 그런 사람이 된다.
이것이 현학 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기운이 스며든다는 것의 실체다. 신비한 이야기가 아니다. 매일 저녁 같은 불평을 듣는 사람은 그 불평의 문장을 외우게 되고, 외운 문장은 어느 날 자기 입에서 나온다.
사나운 기운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명리로 말하면 제어되지 않은 칠살(七殺)이나 상관(傷官)을 몸에 두른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누군가와 싸우는 중이다. 상대는 매번 바뀌는데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직장 상사, 전 연인, 택배 기사, 나라 정책. 세상이 자기를 억울하게 한다는 확신이 있고, 그 확신을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매일 배달한다.
그 배달을 받는 사람은 처음에는 위로를 한다. 다음에는 같이 욕을 한다. 마지막에는 자기도 억울해진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억울하다. 기운이 옮은 것이다.
불평은 입에서 나오는 것 같지만, 실제로 도착하는 곳은 듣는 사람의 귀다. 말하는 사람은 비우고 나가는데 듣는 사람은 채워서 집에 간다. 그러니 누가 손해인지는 계산이 어렵지 않다.
기분이 옮는다는 것은 현학의 주장만이 아니다. 하버드와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구자들이 미국 매사추세츠 프래밍엄 마을 주민 수천 명을 수십 년에 걸쳐 추적한 자료를 뒤졌다. 2008년에 영국 의학 저널(BMJ)에 실린 결과다.
행복은 옮았다. 가까이 사는 친구가 행복해지면 나도 행복해질 가능성이 올라갔다. 배우자도 그랬고, 이웃도 그랬다. 그것도 한 사람만 건너는 것이 아니라 친구의 친구의 친구까지, 세 단계를 건너 퍼졌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직장 동료의 행복은 옮지 않았다는 점이다. 회사에서 누가 행복하든 나와는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각자 판단할 일이다.
행복이 이렇게 옮는다면 그 반대도 옮는다. 연구자들은 그렇게 썼다.
여기까지 읽고 이런 반론이 나올 수 있다. 그래도 사람은 많이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인맥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명리로 보면 사람들이 인맥이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은 비겁(比劫)이다. 나와 같은 오행, 같은 밥그릇을 노리는 사람들이다. 비겁이 모이면 하는 일이 하나 있다. 재성(財星)을 나눈다. 그래서 인맥 모임에 다녀오면 명함은 두꺼워지고 지갑은 얇아진다.
명함을 백 장 받아온다는 것은 겁재(劫財)를 백 명 늘린 것과 다르지 않다. 그 백 명 중에 나중에 밥을 사겠다고 연락하는 사람은 없고, 밥을 사달라고 연락하는 사람은 있다.
정말 힘이 되는 관계는 숫자로 오지 않는다. 내가 흔들릴 때 뒤에서 받쳐주는 인성(印星) 같은 사람, 내 것을 지켜주는 관성(官星) 같은 사람은 한 사람이 있어도 충분하다. 그런 사람은 인맥 모임에서 만나지 않는다. 대개는 이미 옆에 있는데 못 알아보고 있다.
인맥을 위해 자기를 굽히고, 소모하는 사람 앞에서 억지 웃음으로 맞춰주는 것도 명리로 보면 뜻이 있다. 기신(忌神)과 합하는 것이다.
합은 좋은 것으로 들린다. 그러나 나에게 해로운 글자와 합하면 내 글자가 그쪽으로 끌려간다. 내 것이 내 것으로 있지 않고 상대 쪽에 붙어 버린다. 억지로 맞춰주는 관계가 끝나고 나면 어딘가 내 것을 두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적천수(滴天髓)에 이런 구절이 있다. 澄濁求淸淸得淨, 時來寒谷也回春. 탁한 것을 가라앉혀 맑음을 구하고 그 맑음이 깨끗해지면, 때가 왔을 때 차가운 골짜기에도 봄이 돌아온다는 뜻이다.
여기서 맑다는 것은 글자가 적다는 뜻이 아니다. 쓸모없는 글자가 쓸모 있는 글자와 어지럽게 얽혀 있지 않다는 뜻이다. 판 위에 글자가 여덟 개밖에 없는데도 서로 물고 뜯고 있으면 그것이 탁한 것이고, 글자마다 자기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하고 있으면 그것이 맑은 것이다.
사람 사이도 같다. 열 명과 대충 얽혀 있는 것이 탁한 것이고, 세 명과 제대로 이어져 있는 것이 맑은 것이다. 그리고 적천수의 말대로 판이 맑아야 운이 왔을 때 받아먹을 수 있다. 탁한 판에 좋은 운이 오면 그 운도 어지러운 글자들 사이에 끼어서 누구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양생(養生)이라는 말을 요즘은 몸에 좋은 것을 먹고 운동하는 뜻으로 쓴다. 그러나 양생의 첫째는 새지 않게 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을 넣어도 바닥에 구멍이 나 있으면 소용이 없다.
소모하는 사람과 저녁을 먹고 돌아온 날은 잠이 안 온다. 집에 오면 소파에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한다. 좋은 것을 먹었는데 기운이 빈다. 그것이 새는 것이다. 그러니 어울리는 사람의 범위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어떤 보약보다 앞선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보약은 넣는 것이고 이것은 막는 것이다. 순서가 그렇다.
현학을 조금 아는 사람이 친구를 함부로 사귀지 않는 이유는 여기까지다. 그들은 냉정한 것이 아니다. 자기 풍수를 자기 손으로 관리하고 있는 것뿐이다. 이사를 하지 않아도 되고, 나경(羅經)을 들고 다닐 필요도 없다. 전화번호부만 열어 보면 된다.
다만 하나 남는 것이 있다. 그 전화번호부 안에서 당신은 누구의 산이고 누구의 물인지. 남의 풍수를 따지는 눈으로 자기를 한 번 볼 일인데, 그것은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