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파와 강호파, 이론 없는 실전은 어디까지 가는가
중국 명리학 동네에는 오래된 편 가르기가 하나 있다. 서방파(書房派)와 강호파(江湖派)다.
서방파는 글자 그대로 서재에 앉아 책으로 공부한 사람들이다. 벼슬하던 선비, 과거에 붙은 진사, 집안이 넉넉해서 밥벌이로 사주를 볼 필요가 없던 사람들. 강호파는 그 반대다. 장터 한구석, 절 앞 골목, 배 타고 다니는 나루터에서 사람 팔자를 봐 주고 밥을 먹던 직업 술사들이다.
명리학의 굵직한 책들은 거의 서방파 손에서 나왔다. 삼명통회(三命通會)를 쓴 만민영(萬民英)은 명나라 진사 출신 관리였다. 자평진전(子平眞詮)의 심효첨(沈孝瞻)은 청나라 건륭 연간의 진사다. 이 사람들은 손님을 받은 적이 없다. 책을 읽고, 생각하고, 정리하고, 다시 책으로 남겼다.
강호파는 책을 남기지 않았다. 대신 입으로 전하는 구결을 남겼다. 영요편(英耀篇) 같은 것이 그 흔적이다. 첫머리가 이렇게 시작한다. 문에 들어서면 먼저 온 뜻을 살피고, 입을 열면 머뭇거리지 말라. 팔자 이야기가 아니다. 손님을 읽는 기술이다. 옷차림, 걸음걸이, 말투, 눈 돌아가는 방향으로 이 사람이 왜 왔는지 먼저 알아채고, 그다음에 팔자를 편다. 강호파의 실전이란 상당 부분 이것이었다.
그래서 중국 인터넷에서 이 둘을 논할 때 자주 나오는 말이 있다. 순수한 강호파는 있어도 순수한 서방파는 없다. 강호파는 평생 책 한 권 안 읽고도 밥을 먹을 수 있지만, 서방파는 아무리 서재에 앉아 있어도 결국 누군가의 팔자를 실제로 맞춰 봐야 자기 이론이 맞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언뜻 강호파 편을 드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뒤집어 읽으면 다른 뜻이 된다. 책 없이 실전만 하는 사람은 자기가 왜 맞았는지, 왜 틀렸는지 끝까지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것은 서방파의 대표라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밥벌이를 했다는 점이다.
적천수천미(滴天髓闡微)를 쓴 임철초(任鐵樵)는 스스로 밝히기를, 집안이 기울어 명리로 입에 풀칠을 했다고 했다. 그가 남긴 책에는 수백 개의 실제 명조가 들어 있다. 이론서이면서 동시에 손님 장부다. 원수산(袁樹珊)은 원래 의원이었다. 진강과 상해에서 병도 보고 팔자도 보면서 명리탐원(命理探原)을 썼다. 위천리(韋千里)는 대학을 나온 사람인데, 상해에서 사주를 봐 주며 살았다. 자기 팔자를 풀면서 용신(用神)이 힘이 없어 이 일로 겨우 먹고산다고 적어 둔 것이 지금까지 회자된다.
그러니까 살아남은 이름들은 대체로 이론을 세운 다음에 실전으로 나간 사람들이다. 실전만 하다가 이론을 세운 사람은 이름이 남지 않았다. 남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쓰레드를 좀 들여다보면 이 싸움이 그대로 옮겨와 있다.
실전이 중요하다, 간명 몇 백 명, 몇 천 명, 몇 만 명을 보면 뭐가 보인다, 이론만 판 애들은 실제 사람 앞에 앉혀 놓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 이런 글이 하나 있으면, 그 옆에는 이십 년 했다, 삼십 년 공부했다는 글이 있다. 그런데 그 삼십 년 공부한 사람이 쓴 글을 읽어 보면, 삼십 년 동안 무엇을 공부한 것인지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론은 없고 단정만 있다. 연차가 실력이면 동네 노인정에서 삼십 년 장기 둔 어르신이 프로 기사여야 한다.
공부하는 방법도 여러 갈래다. 유튜브로 배우는 사람, 블로그로 배우는 사람, 요즘은 인공지능에게 해설을 들으면서 배우는 사람. 인공지능에게 명리 서적을 통째로 먹이고 그것으로 사주 엔진을 만들어 점검하는 사람도 있다. 이론 체계도 여러 갈래다. 한국에서 자체적으로 굳어진 해석 체계가 있고, 고전을 그대로 읽는 해석 체계가 있고, 중국과 대만에서 들어온 체계가 있다. 이 셋이 같은 팔자를 두고 다른 말을 한다.
이십 년쯤 전까지 유명하다는 이론은 거의 다 읽어 보고 명조를 대 보며 검증했던 사람으로서 내린 결론은 단순하다. 특이한 이론은 이론이 아니다. 고전에서 벗어나 새로 만들었다는 이론일수록, 맞는 팔자에서만 맞았다. 틀린 팔자를 가져오면 예외 규정이 하나 더 붙었다. 예외가 규칙보다 많아지면 그것은 이론이 아니라 기억력 시험이다.
실전에 대한 결론도 단순하다. 실전은 초기에 말문을 트는 데는 좋다. 팔자를 펴 놓고 첫 마디를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에게, 실제 사람 백 명을 앉혀 보는 것보다 좋은 약은 없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이론이 아주 단단하지 않으면, 실전이 천 번이 되든 만 번이 되든 실력은 늘지 않는다. 같은 실수를 만 번 반복하게 될 뿐이다.
학교 공부를 생각해 보면 된다. 문제집을 열 권 푼 학생과 개념을 제대로 잡은 학생 가운데 누가 처음 보는 유형에 강한가. 문제만 많이 푼 학생은 봤던 문제는 잘 푼다. 못 봤던 문제 앞에서는 봤던 문제 중에 제일 비슷한 것을 골라 그 답을 쓴다. 간명 만 명이라는 것도 이것과 비슷한 데가 있다. 만 명을 봤다는 것은 만 개의 봤던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지, 만 한 번째 사람을 풀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게다가 사주는 수학 문제가 아니라 인생이다.
팔자 여덟 글자를 아무리 정확하게 읽어도, 그것을 인생의 말로 옮기는 것은 읽는 사람의 몫이다. 직장에 다녀 본 적이 없는 사람이 관성(官星)의 흐름을 보고 승진과 이직을 이야기한다. 연애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재성(財星)과 관성이 어떻다며 남녀 사이를 이야기한다. 나라 밖에서 살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역마(驛馬)가 움직인다며 이민을 권한다. 글자는 맞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 글자가 현실에서 어떤 얼굴로 나타나는지를 모르니, 자기 딴에는 맞는 말을 하면서도 틀린 말을 하게 된다.
강호파가 손님의 옷차림부터 살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팔자 이론이 약한 대신 사람을 많이 알았다. 서방파가 진사 벼슬을 하며 책을 쓸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손님은 안 받았지만 관료 사회의 밑바닥부터 꼭대기까지를 몸으로 겪었다. 어느 쪽이든 인생을 아는 사람이 팔자를 인생으로 번역할 수 있었다.
장자 천도편(天道篇)에 수레바퀴 깎는 윤편(輪扁)의 이야기가 나온다. 제나라 환공이 마루 위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마루 아래서 바퀴를 깎던 윤편이 묻는다. 무슨 책을 읽으십니까. 옛 성인의 말씀이다. 그 성인은 살아 계십니까. 돌아가셨다. 그러면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입니다. 환공이 화를 내자 윤편이 말한다. 저는 바퀴를 깎을 때 너무 느슨하면 헐겁고 너무 빡빡하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그 손끝의 감각을 아들에게 말로 가르칠 수가 없어서 일흔이 되도록 제가 직접 깎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보통 실전 쪽이 인용한다. 책은 찌꺼기다, 손끝이 진짜다. 그런데 윤편은 마지막에 자기도 아들에게 못 가르쳤다고 고백한다. 실전은 전해지지 않는다. 전해지는 것은 이론뿐이고, 이론으로 전해지지 않는 것은 각자가 자기 손으로 다시 깎아야 한다.
논어에는 이런 말도 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막막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책만 읽는 사람은 막막하고, 실전만 하는 사람은 위태롭다는 말로 읽어도 될 것이다.
그래서 서방파냐 강호파냐를 물으면 답이 없다. 진사 출신들이 책을 쓰고, 그 책을 읽은 사람이 집안이 기울어 시장에 나가 앉고, 시장에서 본 명조를 다시 책에 적고, 그 책을 다음 사람이 서재에서 읽는다. 명리학은 천 년 동안 이렇게 서재와 시장 사이를 오갔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은 그 왕복의 어디쯤에 서 있는가. 책만 읽었다면 아직 시장에 나가 본 적이 없는 것이고, 만 명을 봤다면 아직 서재로 돌아온 적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자기 인생은 얼마나 살아 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