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모르는 사람을 멀리하라, 쓸데없는 인과는 묻히지 마라
남을 돕는 일은 착한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기운의 거래다.
사주로 말하면, 내가 누군가를 돕는 순간 나는 식상(食傷)을 쓰고 있고, 상대는 인성(印星)을 받고 있다. 이 거래가 한 바퀴 돌아 나에게 되돌아오면 유통(流通)이고, 돌아오지 않으면 그냥 설기(洩氣)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을 멀리하라는 옛말은 도덕 훈계가 아니다. 새는 곳을 막으라는 실무 지침에 가깝다.
어릴 때부터 남에게 잘하라고 배웠다. 손 한 번 내미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이고,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들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안다. 모든 호의가 메아리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속을 다 꺼내 도와준 사람이 돌아서서 그 일을 깨끗이 잊는다. 애써 놓아준 다리가 나중에 내 발목을 잡는다.
몇 일전에 중국판 틱톡에서 본 이야기가 있는데,
어떤 여자가 너무 가난해서 누구의 생활 자금 지원을 받아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합격했다고
그래서 그 지원해준 사람은 기뻐하면서,
혹시 생활비가 부족하지는 않은지 연락을 했는데
차단되었더라고
그 도움 받은 사람은 ?
과거의 불행했던 자신과 단절하고 싶어서
자기를 도운 은인을 차단하고 삭제한 것
인간이란 이런 존재일수 있다는 거지
자기 계산만 하는 존재
문제는 이 사람이 나중에 공무원이 되는데,
이 도움 받은 자금 출처를 확인받아야 임용이 되는 상황이 되었다고
그래서... 하는 말
少沾因果 勿幫愚人
인과를 함부로 묻히지 말고, 어리석은 사람을 돕지 말라는 말이다. 차갑게 들린다. 그런데 이 말을 하는 사람은 대개 한 번 크게 데어 본 사람이다.
여기서 인과라는 말을 명리의 언어로 바꿔 보자. 그러면 왜 어떤 도움은 복이 되고 어떤 도움은 재앙이 되는지 구조가 보인다.
팔자에서 내가 밖으로 내놓는 것은 전부 식상이다.
말, 재주, 시간, 아이디어, 사람 소개, 밤새 짜 준 계획서. 하나도 빠짐없이 식상의 일이다.
식상은 일간(日干)이 낳은 것이다. 낳는다는 것은 내 것을 떼어 준다는 뜻이라, 쓰면 쓸수록 일간의 힘이 빠진다. 이것을 설기라고 한다.
빠진 힘이 헛되지 않으려면 식상이 재성(財星)으로 이어져야 한다. 식상생재(食傷生財). 내놓은 것이 어떤 형태로든 돌아오는 구조다. 돈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몇 해 뒤 내가 넘어졌을 때 불쑥 나타나는 손일 수도 있다.
반대로 받는 쪽에서 보면, 도움을 받는 것은 인성을 받는 것이다. 인성은 나를 낳아 주는 별이고, 받는 별이고, 은혜를 기억하는 별이다.
그런데 사람마다 인성을 담는 그릇의 크기가 다르다. 그릇이 없는 사람에게 부어 주면 바닥으로 다 새 버리고, 그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받았는지조차 모른다.
혹은 재극인이 되는 사람은 이득 앞에서는 은혜를 잊는다.
이 구조를 머리에 두고 네 가지를 보자.
첫째. 아무것도 내놓은 적 없이 큰 부탁부터 하는 사람.
평소에 오간 정이 없다. 밥 한 끼 산 적 없고, 안부 한 번 물은 적 없다. 그런데 어느 날 전화가 와서 처음 꺼내는 말이 큰 부탁이다. 머리를 빌려 달라거나, 사람을 붙여 달라거나, 판을 깔아 달라거나.
말투는 가볍다. 마치 내가 도와주는 것이 당연한 순서인 것처럼.
이런 사람의 팔자에서 자주 보이는 것이 재극인(財剋印)이 지나친 구조다. 재성이 인성을 치는 사주는 이해득실이 은혜를 밀어낸다. 받은 것은 잊고 얻은 것만 센다.
이 사람에게 내 도움은 처음부터 인성이 아니었다. 재성이었다. 공짜로 굴러온 자원이다. 그러니 일이 잘되면 자기 능력이고, 일이 틀어지면 자원을 잘못 공급한 내 탓이 된다. 이 사람 머릿속에서 그 계산은 아주 자연스럽다.
여기서 인과라는 말이 무겁게 들어온다.
남의 곤란한 문제를 떠안는다는 것은, 그 사람 판에 있는 칠살(七殺)을 내 판으로 옮겨 오는 일이다. 칠살은 주인을 가리지 않는다. 남의 살도 내 마당에 들어오면 나를 친다.
그 사람은 자기 살을 스스로 제(制)할 생각이 없다. 내 식신(食神)으로 대신 눌러 달라는 것이다. 남의 살을 내 식신으로 누르면 내 식신은 닳고, 그 살은 원래 남의 것이라 내가 끝까지 다스릴 수도 없다.
깊이 들어갈수록 더 빠진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남의 구세주 노릇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다.
둘째. 부탁하기 전에 먼저 성의를 보이는 사람.
작은 선물이라도 들고 온다. 아니면 지난번 신세를 먼저 입에 올린다. 자세를 바로 하고 나서 묻는다.
이것을 겉치레로 보는 사람이 있는데, 아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식상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남에게 무엇을 먼저 내놓는다는 것은 자기 안에서 밖으로 내보내는 통로가 열려 있다는 뜻이다. 식신이 살아 있는 사람은 받은 것을 안에 가두지 않는다. 받은 인성이 일간을 거쳐 식신으로 나가고, 그것이 다시 재성으로 돌아온다.
이런 사람과의 거래는 한 바퀴가 돌아간다. 내가 준 것이 그 사람 안에서 썩지 않고 흐른다.
옛 기록에 이런 사람의 표본이 있다. 전국시대 범수(范雎)는 위나라에서 모함을 받아 죽도록 매를 맞고 변소에 버려졌다가 살아남아 진나라로 달아났고, 훗날 진나라 재상이 되었다. 사기 범수채택열전은 그가 재상이 된 뒤의 행보를 한 줄로 적었다.
一飯之德必償 睚眦之怨必報
밥 한 그릇의 은혜도 반드시 갚고, 눈 한 번 흘긴 원한도 반드시 갚았다는 말이다.
실제로 범수는 자기를 숨겨 준 정안평(鄭安平)과 진나라로 데려다준 왕계(王稽)를 왕에게 천거해 장군과 태수로 만들었다. 이 사람이 곤경에 있을 때 손을 내민 사람들은 그 손을 잃지 않았다.
도덕경 마지막 장에 이런 구절이 있다.
既以爲人己愈有 既以與人己愈多
남을 위해 쓸수록 자기가 더 가지게 되고, 남에게 줄수록 자기가 더 많아진다는 뜻이다. 이 말은 아무에게나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준 것이 돌아서 오는 구조를 가진 사람, 즉 유통이 되는 판에서만 성립한다. 새는 판에서는 줄수록 준다.
이런 사람을 도우면 그것은 소모가 아니라 뿌리는 일이다.
셋째. 어려울 때 곁에 누가 남는가.
사람을 알아보려면 잘나갈 때 하는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넘어졌을 때 주변을 보면 된다.
바닥에 있는데 친척과 친구가 하나둘 손을 내민다. 여럿이 장작을 보태 불을 살린다. 이런 사람은 평소 사람 노릇이 나쁘지 않았다고 보면 된다. 남의 마음은 공짜로 움직이지 않는다.
명리로 말하면, 관살(官殺)이 치고 들어오는 운에 인성이 살아 있는 사람이다. 살이 오면 인성이 그것을 받아 일간을 살린다. 살인상생(殺印相生). 어려운 시기에 나타나는 귀인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평소 식신으로 뿌린 것이 재성이 되고, 재성이 관성을 낳고, 관성이 인성으로 돌아온 것이다. 식상, 재, 관, 인. 팔자가 한 바퀴 도는 순서 그대로다. 귀인은 이 순환의 마지막 정거장에서 나타난다.
반대로 곤경에 빠졌는데 둘러봐도 아무도 없는 사람이 있다.
세상은 그리 따뜻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뼛속까지 차갑지도 않다. 한 사람이 사방에서 외면당하는 지경까지 갔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본인만 모른다.
이런 사람의 판에는 대개 두 가지 중 하나가 있다. 겁재(劫財)가 강해 주변의 재를 자기 쪽으로 끌어오며 살아온 사람이거나, 상관(傷官)이 다스려지지 않아 입과 행동으로 사람을 다치게 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둘 다 자기 손으로 유통을 끊은 경우다. 앞서 도와준 사람들은 마음이 식어 빠져나갔고, 그 빈자리가 지금의 고립이다.
여기에 내가 유일한 착한 사람으로 걸어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가. 앞사람들이 빠져나온 자리에 내가 들어가는 것이다. 앞사람들이 왜 나갔는지는 곧 알게 된다.
태상감응편 첫머리가 이것을 한 줄로 말한다.
禍福無門 惟人自召
화와 복에는 정해진 문이 없고, 사람이 스스로 불러들인다는 뜻이다. 사방이 빈 것도 그 사람이 부른 것이다.
넷째. 도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
가장 힘 빠지는 일은 못 도와줬을 때의 미안함이 아니다. 온 힘을 다해 도왔는데 상대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길 때다.
며칠 밤을 새워 정리해 준 계획서를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넘기고, 돌아서서 자기 공으로 올린다. 내 인맥으로 문제를 풀어 줬더니 그것이 손쉬운 일인 줄 알고 다음에는 더 큰 것을 요구한다.
열 번 도와주다 한 번 못 도와주면 앞의 아홉 번이 전부 없던 일이 되고, 원망만 남는다. 쌀 한 되를 주면 은인이고, 한 말을 주면 원수가 된다는 승미은 두미구(升米恩 斗米仇)가 이것이다.
명리로 보면 이 현상은 인성 과다의 병이다.
인성이 알맞으면 일간을 살리지만, 넘치면 식신을 엎는다. 이것을 도식(倒食)이라고 한다. 받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은 스스로 내놓는 힘이 죽는다. 게을러지고, 기대고, 당연하게 여긴다.
내가 도움을 퍼붓는 것은 상대 판에 인성을 밀어 넣는 일이다. 적당하면 살리고, 넘치면 그 사람의 식신을 죽인다. 그러면 그 사람은 감사할 능력 자체를 잃는다. 감사는 식신의 일이기 때문이다. 내놓는 통로가 막힌 사람은 고마움도 내놓지 못한다.
그러다 인성이 끊기면, 이 사람은 식신이 없어 스스로 설 수 없다. 그래서 끊은 사람을 원망한다. 아홉 번의 은혜가 열 번째에 원한으로 바뀌는 구조가 이렇다.
실제 사례가 있다. 중국 배우 손려(孫儷)는 2002년부터 가난한 고등학생 향해청(向海淸)의 학비와 생활비를 댔다. 학생은 대학에 들어갔고, 후원은 이어졌다. 그런데 대학 생활이 시작되자 씀씀이가 늘고 요구가 잦아졌다. 후원이 중단되자 2007년 이 학생은 육천 자에 이르는 글로 후원자를 공개 비난했고, 그 글이 인터넷에 퍼졌다. 여론은 후원자 편이었다. 오 년 넘게 받은 사람이 끊긴 순간 원수가 된 경우다.
같은 나라의 가수 총비(叢飛)는 십 년 넘게 백칠십 명이 넘는 학생을 후원해 삼백만 위안 가까운 돈을 썼다. 2005년 위암 진단을 받고 병상에 누웠을 때, 그가 후원한 학생 중 병문안을 온 사람은 손에 꼽혔다. 한 학부모는 병상의 그에게 전화를 걸어 언제 다시 송금이 시작되느냐고 물었다.
두 사례 모두 후원자가 나빴던 것이 아니다. 준 것이 상대 안에서 인성으로 남지 않고, 넘쳐서 식신을 엎은 것이다.
네 가지를 모으면 하나로 줄어든다.
식상은 낳는 별이지만 무한하지 않다. 유통되는 곳으로 흘리면 늘고, 새는 곳으로 흘리면 준다. 선의에도 총량이 있고, 그 총량은 어디로 흘리느냐에 따라 자산이 되기도 하고 부채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착하게 살라는 말과 아무나 돕지 말라는 말은 서로 부딪치지 않는다. 물을 어느 밭에 댈 것인가의 문제일 뿐이다.
지난 일 년 동안 내가 도운 사람을 셋만 떠올려 보자.
그중 한 바퀴 돌아온 것이 있는가. 아직 돌아오는 중인가. 아니면 애초에 돌아올 길이 없는 곳에 부었는가.
내 식신이 지금 어느 밭에 물을 대고 있는지는 나만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