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파는 사람, 시간을 사는 사람
가난한 사람의 문제는 돈이 없는 것이 아니다. 돈이 없는 것은 결과다. 진짜 문제는 시간을 어디에 쓰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밤이면 결심한다. 이대로는 안 된다, 뭔가 해야 한다, 내일부터 달라져야 한다. 그런데 아침이 오면 어제와 같은 길을 걷는다. 출근하고, 시키는 일 하고, 퇴근하면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잠든다. 물론 게임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유튜브에서 어떻게 성공하나? 인스타에서 빠르게 돈 버는 법 그런것을 보면서 다짐하고 자는 사람도 많다.
문제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똑같거나
설사 행동을 하고 변화를 했다고 해도, 몇일 길어야 석달안에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다.
중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밤에는 천 갈래 만 갈래 길을 생각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어제 그 길을 간다(晚上想想千條路 早上起來走原路)." 이것이 가난에 갇힌 사람의 하루다.
여기서 명리학의 눈을 빌려 보면, 이 구조가 보인다.
밤의 결심은 식상(食傷)이다.
식상은 일간이 뱉어내는 기운이다. 생각, 표현, 시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힘. 밤에 이불 속에서 올라오는 "뭔가 해야지"라는 충동이 바로 식상이다.
그런데 아침이 되면 관살(官殺)이 기다리고 있다. 출근 시간, 상사의 지시, 실적 압박, 거래처 전화. 관살은 나를 통제하는 힘이다. 관살이 강한데 식상이 약하면, 밤의 결심은 아침 햇살에 녹는 서리가 된다.
식상이 관살을 제어하지 못하면, 사람은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없다. 식신제살(食神制殺)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내 안에서 나오는 힘이 바깥에서 치는 힘을 감당해야 비로소 내 시간이 생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시간이 없는 사람이 하는 가장 어리석은 일이 있다.
남은 시간마저 잠가버리는 것이다.
월급이 500이라고 하자. 먹고 입으면 300이 나간다. 남는 200. 이 200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여러 가지다. 배우는 데 쓸 수도 있고, 작은 시도에 넣을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쌓아둘 수도 있다.
그런데 가난에 갇힌 인지 구조를 가진 사람은 이 200을 체면에 쓴다. 6천만 원짜리 차를 할부로 산다. 동창 앞에서, 옆집 앞에서, 거울 앞에서 기가 살아야 하니까. 그 순간 앞으로 3년에서 5년의 월급은 이미 팔린 것이다. 아직 벌지도 않은 미래의 시간이 할부 계약서에 묶였다.
더한 경우도 있다. 집을 산다. 30년 대출을 안고. 이것은 자기 앞으로 남은 시간 가운데 가장 생산적인 기간 전부를 미리 납품하는 행위다.
명리학에서 보면 이것은 비겁(比劫)이 재성(財星)을 끌고 가는 구조다.
비겁은 나와 같은 오행이다. 형제, 동료, 경쟁자. 그리고 체면. "남들이 다 하니까", "저 사람은 벌써 샀는데", "나만 뒤처지면 안 되니까." 이 마음이 비겁이다. 비겁이 움직이면 재성을 직접 잡으려 한다. 식상을 거치지 않고, 생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결과물에 손을 뻗는다.
군비쟁재(群比爭財)라는 말이 있다. 비겁이 떼를 지어 하나의 재성을 다투는 형국이다. 겉으로는 차를 사고 집을 사서 재성을 얻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미래의 재성 전부를 한꺼번에 끌어와서 지금의 비겁(체면)에게 갖다 바친 것이다. 얻은 것이 아니라 빼앗긴 것이다.
겁재견재필탈(劫財見財必奪)이라는 구절이 여기서 작동한다. 겁재가 재성을 보면 반드시 빼앗는다. 체면이라는 겁재가 통장의 재성을 보는 순간, 참지 못한다.
사람이 진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먹는 것, 입는 것, 잘 곳. 이 셋이 전부다. 나머지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죽지 않는다. 차가 없으면 버스를 타면 되고, 집이 자기 것이 아니어도 살 곳은 있다.
그런데 비겁이 강한 구조에서는 이 구분이 안 된다. 필요한 것과 보여주고 싶은 것의 경계가 사라진다. 남의 눈에 비치는 내 모습이 곧 나 자신이 되어버린다. 이것이 비겁의 작용이다. 비겁은 나와 남의 경계에 서 있는 글자이기 때문에, 비겁이 강하면 남과의 비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옛말에 재불입급문(財不入急門)이라 했다.
재물은 급한 문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을 명리로 옮기면 이렇다. 재성은 식상에서 온다. 식상은 일간이 여유 있게 뱉어내는 힘이다. 여유가 없으면 뱉어낼 것이 없다. 급하면 식상이 작동하지 않는다. 관살에 쫓기고 비겁에 치이면 식상은 숨을 곳이 없다. 식상이 죽으면 식상생재(食傷生財)의 통로가 끊어진다. 재물이 만들어질 경로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큰돈을 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거의 대부분 어느 시점에 시간의 여백이 있었다. 그 여백 안에서 한 가지를 붙들고 깊이 파고든 시기가 있었다. 그것이 식상이 살아 있는 상태다. 식상이 살아야 재성으로 흘러간다.
반대로, 하루 종일 일해도 돈이 모이지 않는 사람은 식상이 아니라 관살에 시간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관살은 나를 쓰는 힘이지, 내가 쓰는 힘이 아니다. 관살에 묶인 시간은 남의 재성을 만들어 줄 뿐 내 재성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인성(印星)의 부재다.
인성은 나를 낳아주는 기운이다. 배움, 깨달음, 방향 감각. 인성이 살아 있으면 일간이 힘을 받고, 일간이 힘을 받으면 식상을 뱉어낼 수 있다.
가난에 갇힌 사람은 인성을 거부한다. 배우는 데 시간을 쓰지 않는다. 대신 유튜브에서 10분짜리 영상을 보고 다 안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 느낌은 인성이 아니다. 인성은 시간을 들여 몸에 새겨지는 것이지, 눈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인성이 없으면 일간이 마르고, 일간이 마르면 식상이 나오지 않고, 식상이 없으면 재성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인성 → 일간 → 식상 → 재성. 이 순환이 끊어진 자리에서 아무리 비겁으로 버텨봐야, 아무리 관살에 매달려봐야, 재물은 쌓이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가난은 잔고의 문제가 아니라 순환의 문제다.
시간이 어디로 흘러가는지가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결정한다. 시간을 관살에 전부 바치면 남의 살림을 하는 것이고, 시간을 비겁에 쓰면 체면값을 치르는 것이고, 시간을 식상에 넣으면 비로소 내 재성으로 돌아온다.
파킨슨이라는 영국 학자가 1955년에 이런 말을 했다. "지출은 수입이 허락하는 만큼 늘어난다(Expenditure rises to meet income)." 버는 만큼 쓴다는 뜻이다. 100을 벌면 100을 쓰고, 200을 벌면 200을 쓴다. 이것을 파킨슨의 법칙(Parkinson's Law)이라 부른다.
명리로 보면 이것은 비겁이 재성을 따라가는 형국이다. 재성이 커지면 비겁도 커진다. 관살이 재성을 생해주면(재생관살) 체제는 더 커지고, 비겁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월급이 올라도 여유가 생기지 않는 구조. 식상이 끼어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이 고리를 끊는 방법은 하나다. 식상에 시간을 먼저 넣는 것이다.
재성을 쫓기 전에 식상을 살리는 것. 돈을 벌기 전에 돈을 만들 능력을 기르는 것. 체면을 세우기 전에 체면 없이 버틸 수 있는 힘을 만드는 것.
적천수(滴天髓)에 이런 구절이 있다.
何知其人貧 財神反不真
어떻게 그 사람이 가난한 줄 아는가. 재성이 도리어 참되지 않기 때문이다.
재성이 참되지 않다는 것은, 재성은 있는데 쓸 수 없거나, 있는 척하는데 실속이 없거나, 잡히는 것 같은데 손에 남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할부로 산 차, 대출로 산 집, 카드로 긁은 명품. 전부 재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참된 재성이 아니다.
사실 이 모든것은 당신이 그 돈이 있다는 표식이 아니라, 과거에 그 돈이 있었다는 것. 즉 소비를 보여주지 현재의 부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이 재신부진(財神不真)의 한 모습이다.
참된 재성은 식상에서 자라난 것이다. 내가 만들어낸 것, 내 시간을 넣어서 나온 것, 빌리지 않고 뱉어낸 것. 그것만이 남는다.
지금 내 시간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관살에 전부 묶여 있는가, 비겁에 새고 있는가, 아니면 식상에 조금이라도 닿고 있는가.
밤의 결심이 아침에도 살아 있으려면, 식상이 버틸 자리가 있어야 한다. 그 자리는 누가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데 쓰던 시간을 빼서 만드는 것이다.
시간을 파는 사람과 시간을 사는 사람의 차이는, 하루 끝에 내 식상이 한 뼘이라도 자랐는가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