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에서 좋아함보다 먼저 와야 하는 건 존중이다. 순서가 바뀌면 관계가 아니라 사육이 된다.
이런 사람 한 명쯤은 봤을 거다.
입으로는 좋아한다, 아낀다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당신 말을 뚝 끊는다.
당신이 읽는 책을 보고 영양가 없다고 한다.
당신 휴대폰을 제 것처럼 뒤진다.
당신 인생 계획에 인생 선배인 척 감 놔라 배 놔라 한다.
불편하다고 하면 이 한마디로 입을 막는다.
"이게 다 너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안 그러면 내가 뭐하러 신경 써. 남이면 신경도 안 쓰지."
말은 그럴듯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걸 사랑받는 중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는 사이 자존감이 한 겹씩 벗겨진다.
존중이 빠진 좋아함은 전부 모래 위에 지은 집이다.
사랑으로 포장한 통제고, 잘 봐줘야 길들이기다.
결혼을 오래 들여다본 심리학자 중에 고트먼이라는 사람이 있다.
부부를 한 아파트에 살게 해놓고 관찰하는 연구실까지 차렸다. 그렇게 수천 쌍을 봤다.
결론은 의외로 단순했다.
이 부부가 갈라설지 아닐지 맞히는 데, 둘이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딱 하나만 보면 됐다.
경멸.
상대를 깔보는 태도. 비웃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가르치고, 너는 나보다 못하다는 신호.
이게 자주 오가는 관계는 깨질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고트먼은 경멸을 두고 사랑을 녹이는 황산이라 불렀다.
사랑이 모자라서 깨지는 게 아니다. 존중이 빠지면 깨진다.
왜 그럴까.
좋아함은 사실 본능에 가깝다.
도파민이 돌면 사람은 고양이한테도, 강아지한테도, 예쁜 인형한테도 좋아하는 마음이 든다.
이 좋아함에는 은근히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과 가지고 싶은 욕심이 섞여 있다.
내 것으로 두고 싶은 마음이다.
존중은 다르다. 존중은 머리를 한 번 굴려야 겨우 나오는 선택이다.
프롬이라는 사람이 쓴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이 있다.
거기서 존중이라는 단어를 뜯어본다.
존중의 뿌리는 라틴어 레스피케레(respicere), 본다는 뜻이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이다.
내 입맛에 맞게 고쳐 쓰는 물건이 아니라, 제 식대로 피어나는 한 사람으로 본다는 것.
프롬은 이렇게 말한다. 책임감도 존중이 빠지면 지배와 소유로 변질된다고.
좋아한다면서 상대의 선을 안 지키고, 상대의 꿈을 우습게 보고, 화풀이 대상으로 쓴다면.
그건 연애가 아니라 반려동물 길들이기다.
사주를 보면 이 자리가 더 선명해진다.
남자에게 배우자 자리를 채우는 별은 정재(正財)고, 여자에게는 정관(正官)이다.
둘 다 본디 순한 별이라, 잘 쓰면 곁을 지켜주는 단단한 인연이 된다.
문제는 다른 기운이 끼어들 때다.
칠살(七殺)은 거칠고 밀어붙이는 기운이다. 다스려지지 않은 칠살은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누른다.
편인(偏印)은 거리를 두면서도 상대를 제 틀에 가두려는 기운이다.
이 두 기운이 제어 없이 날뛰면, 아끼던 마음이 통제로 돌아선다.
다 너 잘되라고 한다는 말이 입에 붙는다.
고트먼이 본 경멸도, 프롬이 말한 지배도, 사주로 보면 결국 같은 자리에서 흘러나온다.
질문 하나만 던지고 마치겠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은 당신을 위에서 내려다보는가, 나란히 옆에서 보는가.
당신이 바보 같은 말을 끝까지 떠들어도 들어주는가, 두 문장 만에 끊는가.
레스피케레. 한 번 더 본다는 뜻이다.
오늘 그 사람을, 그리고 그 사람이 당신을, 서로 어떻게 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