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글자 하나: 도사가 하늘에서 본 장원 명단
범중엄(范仲淹)은 송나라 사람들이 첫손에 꼽는 선비다.
"천하의 근심은 남보다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남보다 늦게 즐긴다"는 말을 남긴 그 사람이다. 공자와 맹자의 길을 곧게 걸었고, 귀신이나 술수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 범중엄이 도사 한 사람 앞에서 말을 잃은 일이 있다.
송나라 장사정(張師正)이 지은 괴이한 이야기 모음 괄이지(括異志)에 이 일이 실려 있다. 조목의 제목은 범참정(范參政)이다.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낸 범중엄이라는 뜻이다.
제목에 붙은 그 벼슬이, 사실은 이 이야기의 답 가운데 하나다.
범중엄이 진주(陳州)에서 통판(通判)으로 일할 때였다. 통판은 지주(知州)를 보좌하면서 감시도 하는 자리다. 그런데 이 지주는 범중엄을 아꼈고, 범중엄도 그를 잘 따랐다.
어느 날 지주의 노모가 병이 났다.
지주는 도사를 불러 안방에 단을 쌓고 하늘에 글을 올리게 했다.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비는 의식이다. 자기는 일이 밀려 자리를 지킬 수 없으니, 의식을 챙기는 일은 범중엄에게 맡겼다.
범중엄은 속으로 웃었다.
산속에서 내려온 사람이 무슨 수로 하늘에 말을 전하나. 지주가 어머니 걱정에 급하니 이런 일을 벌였지, 효심이야 탓할 수 없다. 대신 그 도사가 다시는 이 고을에서 사람을 속이지 못하게 해 두자.
계획은 간단했다. 앞날을 물어보고, 틀리면 웃어 주는 것.
범중엄은 공손하게 도사를 맞았다.
"저도 도법에 관심이 많습니다. 제 앞날이 어떨지 한번 봐 주실 수 있겠습니까?"
도사는 의심하지 않았다.
"하늘에 글을 올리고 나서 봐 드리지요."
도사가 하는 의식은 복장(伏章)이라는 것이었다. 도사가 단 앞에 엎드리면 혼이 하늘로 올라가 글을 바치고 돌아온다고 한다.
밤새 도사는 엎드린 채 꼼짝하지 않았다.
동이 틀 무렵이 되자 범중엄도 불안해졌다. 다가가 몸을 만져 보니 차갑게 식어 굳어 있었다.
망신을 주려던 사람이 고을 안방 단 위에서 죽었다. 범중엄은 지주에게 알리러 나가려 했다.
그때 도사의 몸이 조금 움직였다. 사람을 불러 일으키고 따뜻한 탕약을 먹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도사가 숨을 제대로 쉬었다.
도사는 지주에게 말했다.
"태부인께는 아직 여섯 해의 수명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 병은 걱정하실 것이 못 됩니다."
그리고 범중엄을 보고 말했다.
"그대는 녹(祿)과 수명이 두텁습니다. 반드시 정부(政府)에 들어갈 것입니다."
송나라에서 정부는 재상과 부재상이 앉는 조정의 꼭대기를 가리켰다.
지주가 물었다. 이렇게 오래 걸리는 의식은 처음 본다고.
"하늘에서 마침 내년 봄 진사 합격자 명단을 내걸고 있어서, 그걸 보느라 늦었습니다."
범중엄에게는 기다리던 대목이었다.
"그렇다면 내년 장원이 누군지도 아시겠군요?"
"성은 왕(王)이고, 이름은 두 글자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글자가 먹으로 지워져 있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다른 글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멀어서 그 글자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범중엄이 듣기에는 둘러대는 말이었다. 왕씨는 흔한 성이고, 지워졌다는 글자는 확인할 길이 없다.
얼마 뒤 지주의 어머니는 병을 털고 일어났다.
장원은 왕공수(王拱壽)라는 열아홉 살 청년이었다. 1030년의 일이다.
그런데 이 청년이 장원을 사양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번 시험 문제는 얼마 전에 똑같이 풀어 본 적이 있으니, 이 등수는 다른 수험생들에게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시험관이라면 이보다 반가운 수험생이 없고, 황제라면 이보다 쓸 만한 신하가 없다.
인종(仁宗)은 그를 그대로 장원에 두었다. 그리고 이름 끝 글자를 손수 고쳤다. 수(壽)를 지우고 신(辰)을 넣었다.
왕공신(王拱辰).
북신(北辰)은 북극성이다. 공자는 덕으로 다스리는 사람을 북극성에 빗댔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뭇별이 그 둘레를 돈다고. 공(拱)은 둘러싼다는 뜻이다. 목숨을 감싸는 이름보다, 임금을 받드는 별이 되라는 이름이 낫다고 본 것이다.
괄이지는 이 대목을 이렇게 맺는다. 장원의 이름이 황제의 붓으로 고쳐졌으니, 도사가 하늘에서 본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고.
| 도사의 말 | 그 뒤 |
|---|---|
| 태부인의 병은 걱정할 것이 없다 | 병이 나았다 |
| 범중엄은 정부에 든다 | 1043년 참지정사, 곧 부재상 |
| 장원은 왕씨, 두 글자 이름의 끝 글자가 지워지고 옆에 고쳐짐 | 왕공수가 황제의 붓으로 왕공신이 됨 |
이름을 바꾸면 운이 바뀐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명리에서 명(命)은 태어난 해, 달, 날, 시의 여덟 글자다. 이름은 그 여덟 글자 안에 없다.
이 이야기는 순서가 거꾸로다. 이름이 바뀌어서 장원이 된 게 아니다. 장원이 된 다음에 한 행동 때문에 이름이 바뀌었다. 그런데 그 바뀐 이름이 한 해 전에 이미 하늘의 명단에 고쳐져 있었다.
도사가 본 것은 시험 성적만이 아니었다. 그 청년이 장원 자리 앞에서 어떻게 처신할지까지 명단에 들어 있었다.
명리로 옮기면 이 장면은 정관(正官)의 장면이다.
정관은 정해진 규칙 안에서 자리를 얻는 기운이다. 시험, 벼슬, 직함이 모두 이 글자에 걸려 있다.
정관이 바르게 선 사람은 이득보다 규칙을 먼저 본다. 자기에게 유리한 일이라도 절차가 어긋났으면 그냥 넘기지 못한다.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시험장은 정관이 지배하는 판이다. 규칙으로 짠 판에서는 규칙을 지킨 사람에게 판이 다시 보답한다. 황제가 그를 장원 자리에 그대로 앉힌 것이 그렇다.
칠살(七殺)은 다르다.
칠살은 규칙 밖에서 힘으로 자리를 잡는 기운이다. 막히면 돌아가지 않고 부수고 지나간다. 칠살이 제대로 쓰이는 사람은 난세에 이름을 얻고, 규칙의 판에서는 오히려 자주 부딪힌다.
같은 관성 이름을 달고 있어도 두 글자는 거의 반대쪽을 본다.
덤으로 하나. 황제가 넣어 준 신(辰)은 명리에서 매일 보는 그 글자다. 지지에서는 진(辰)이라 읽고, 진토(辰土)라 부른다. 별을 뜻할 때만 신으로 읽는다. 황제는 별을 주었는데, 명리하는 사람 눈에는 흙이 먼저 보인다.
범중엄에게도 도사는 정부에 든다고 했다.
이보다 앞선 이야기가 하나 있다. 오증(吳曾)의 능개재만록(能改齋漫錄)에 실린 일화다.
젊어서 가난하던 시절, 범중엄은 영험하다는 사당에 가서 점을 쳤다.
他時得位相乎
훗날 재상이 될 수 있겠느냐고 물은 것이다. 신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시 빌었다. 그게 안 된다면 좋은 의원이 되고 싶다고. 그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귀신을 믿지 않는다던 선비가, 젊어서는 사당에 가서 재상이 되겠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범중엄은 1043년 참지정사가 되었다. 참지정사는 부재상이다.
사당의 신은 재상이 못 된다고 했고, 진주의 도사는 정부에 든다고 했다. 둘 다 맞았다.
1043년, 범중엄은 조정의 꼭대기에서 개혁을 시작했다. 경력신정(慶曆新政)이다. 쓸모없는 관리를 줄이고, 연줄로 벼슬을 얻는 길을 좁히려 했다.
그때 관리를 감찰하는 어사대의 우두머리, 어사중승(御史中丞)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왕공신이었다. 그는 새 법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1044년 가을, 지방 문서를 조정에 올리는 관청인 진주원(進奏院)에서 잔치가 열렸다. 범중엄 쪽 젊은 관리들이 모인 자리였다.
왕공신은 이 자리를 문제 삼았다. 공금으로 술을 마시고 기생을 불렀으며, 황제를 비웃는 말이 오갔다고 탄핵했다. 잔치를 연 소순흠(蘇舜欽)은 벼슬을 빼앗겨 평민이 되었고, 함께 있던 이름난 선비 여럿이 지방으로 흩어졌다.
송나라 사람의 기록에는 이때 왕공신이 한 그물에 다 건졌다며 기뻐했다는 말이 남아 있다. 사람들은 일망타진(一網打盡)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고들 한다.
그해 범중엄은 조정을 떠나 서북 변방으로 나갔다. 이듬해 참지정사에서도 물러났다. 경력신정은 거기서 멈췄다.
열아홉 살에 시험 문제를 풀어 봤다며 장원을 사양한 청년. 서른셋에 개혁파를 한 번에 쓸어 낸 어사중승.
둘은 같은 사람이다.
원국은 한 사람이 서 있을 높이의 바탕을 정한다. 대운은 십 년씩 그 위를 지나가면서 바탕을 다지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잠시 다른 모양으로 바꿔 놓기도 한다. 같은 원국이 다른 대운을 만나면 같은 사람이 다른 얼굴을 한다.
왕공신의 명조는 전하지 않는다.
그는 그 뒤로도 오래 벼슬을 했고, 1085년 일흔넷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의각(懿恪)이다.
범중엄은 도사를 시험하려고 장원의 이름을 물었다.
도사는 그날 밤 하늘에서 두 가지를 보고 내려왔다. 범중엄이 정부에 든다는 것, 그리고 장원의 이름.
그 명단이 땅에 걸린 지 열네 해 뒤, 정부에 든 범중엄을 그 자리에서 밀어낸 사람이 그 장원이었다.
도사가 멀어서 못 읽었다던 그 작은 글자 옆에, 다른 무엇이 더 적혀 있었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