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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 다섯을 길러낸 스승의 녹

오대(五代)라는 시대가 있었다.

당나라가 무너진 907년부터 송나라가 들어선 960년까지, 쉰세 해 동안 중원에서 왕조가 다섯 번 바뀌었다. 그사이 황제는 열넷이 나왔고, 그 황제들의 성씨는 여덟이었다.

이 시대의 공기를 한 장수가 한 줄로 정리한 적이 있다. 후진의 절도사 안중영(安重榮)이다.

天子寧有種耶?兵強馬壯者為之爾。

천자가 따로 씨가 있더냐, 군사가 강하고 말이 튼튼한 자가 하는 것이다, 라는 말이다.

칼을 쥔 사람이 부귀를 가져가던 때였다. 붓을 쥔 사람은 쓸 데가 없었다.

그 무렵 낙양에 곽연경(郭延卿)이라는 선비가 살았다. 가르치는 솜씨가 남달라서, 그 문하에서 훗날 재상이 다섯이나 나왔다고 전한다.

그런데 정작 곽연경 자신은 평생 이름 없는 보통 사람으로 살았다.


글 읽는 사람의 차례

송나라가 서자 공기가 바뀌었다.

태조 조광윤이 연호를 건덕(乾德)으로 정한 뒤의 일이다. 궁에 들어온 촉나라 물건 가운데 거울이 하나 있었는데, 뒷면에 건덕 4년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미 남의 나라가 쓴 연호를 모르고 다시 쓴 것이다.

조정의 대신들은 아무도 그 사정을 몰랐다. 학사 두의(竇儀)가 나서서 옛날 촉나라가 쓰던 연호라고 짚어 주었다.

태조는 그 자리에서 한숨을 쉬고 말했다. 재상은 모름지기 글 읽은 사람을 써야 한다.

칼의 시대가 끝나고 붓의 차례가 온 것이다. 곽연경과 제자들도 이제야 글 읽는 사람이 살 길이 열렸다고 여겼다. 모두 과거를 보러 나설 채비를 했다.


신을 거꾸로 신고 나온 사람

그 무렵 천하에 이름난 사람이 하나 있었다. 화산에 숨어 사는 진단(陳摶), 호는 희이(希夷)다.

진단은 한번 누우면 백 일을 넘게 잔다는 이야기로 유명했다. 사람들은 그를 잠자는 신선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보다 더 유명한 것이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었다.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부귀와 앞날을 읽는 솜씨로 천하에 이름이 났다.

태종이 즉위하고 진단을 도성 개봉으로 불렀다. 진단이 화산을 내려와 개봉으로 가는 길에 낙양을 지났다.

곽연경은 이 소식을 듣고 제자 둘을 데리고 찾아갔다. 한 사람은 여몽정(呂蒙正), 한 사람은 장제현(張齊賢)이었다.

진단은 이들이 왔다는 말을 듣자 신을 거꾸로 신은 채 뛰어나와 맞았다. 반가운 손님을 맞을 때 신발을 제대로 신을 틈도 없었다는 옛 표현 그대로다. 백 일을 자는 사람이 신발 챙길 겨를도 없이 나왔으니, 손님 대접으로는 더할 것이 없었다.

진단은 먼저 여몽정을 보고 말했다.

"그대는 장원으로 급제하고, 벼슬이 재상에 이르겠소."

이어 장제현을 보고 말했다.

"그대의 급제 순위는 여군보다 뒤지오. 하지만 복과 녹이 길기로는 여군보다 낫소."

그리고 곽연경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두 제자가 참다못해 말을 꺼냈다.

"이분은 저희 스승이신 곽 선생입니다. 글과 행실로 고을 사람들이 모두 우러르는 분인데, 이분도 좀 봐 주실 수 없겠습니까."

진단은 허허 웃었다.

"알지요. 이분도 아주 좋으시지요."

그 말뿐이었다. 진단은 세 사람을 문밖까지 배웅하고는, 두 제자에게만 슬쩍 일렀다.

"두 분은 저녁에 다시 한번 들러 주시오."


밤에 한 이야기

여몽정과 장제현이 저녁에 다시 찾아가자, 진단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곽군의 일은 낮에 본인 앞에서 말하기가 어려웠소. 뼈대가 빈약하고, 천정(天庭)이 넉넉하게 차지 못했소. 타고난 녹(祿)이 얇은 사람이오. 여군이 재상이 되어야 비로소 벼슬길에 들 것이고, 장군이 재상이 되어야 벼슬 자리 하나를 얻을 것이오."

진단이 짚은 곳은 두 군데다. 뼈대와 이마다.

천정은 이마 한가운데 윗부분, 머리카락이 시작되는 자리 바로 아래를 가리킨다. 관상에서 이마는 하늘이 내려 주는 몫을 보는 곳이다. 윗사람이 끌어 주는 힘, 조상에게서 받은 바탕, 그리고 벼슬이 여기에 걸린다. 이마 한가운데를 따라 내려오는 줄기에 관록궁(官祿宮)이 자리한다.

이마가 둥글게 솟아 넉넉하면 위에서 당겨 주는 손이 있다고 본다. 꺼지거나 좁으면 그 손이 약하다. 곽연경의 이마는 넉넉하게 차지 못했다. 하늘이 먼저 내려 주는 자리가 비어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뼈대다. 관상은 뼈를 먼저 본다. 살은 몇 달 사이에도 붙고 빠지고, 얼굴빛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뀐다. 하지만 뼈는 평생 그대로다. 그래서 한 사람의 그릇 크기는 뼈로 가늠한다.

한나라 초기에 괴통(蒯通)이라는 책사가 한신을 찾아가 관상을 핑계로 이런 말을 했다. 사기(史記)의 회음후열전에 실린 대목이다.

貴賤在於骨法,憂喜在於容色,成敗在於決斷。

귀하고 천함은 뼈의 생김에 있고, 근심과 기쁨은 얼굴빛에 있으며, 이루고 무너짐은 결단에 있다는 말이다.

곽연경은 글과 행실로 고을의 존경을 받던 사람이다. 제자 가운데서 재상이 나올 만큼 가르치는 솜씨도 있었다. 그런데 진단이 본 것은 그의 글이 아니라 그의 뼈였다.

재주와 녹은 서로 다른 장부에 적힌다. 명리에서도 글재주와 벼슬은 서로 다른 글자가 맡는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벼슬을 한다는 법이 없고, 벼슬을 한 사람이 글을 잘 쓴다는 법도 없다.

진단의 말에서 눈여겨볼 곳이 하나 더 있다. 곽연경이 벼슬을 얻는 때를, 곽연경 자신의 운이 아니라 제자들의 출세에 걸어 두었다는 점이다. 스스로 문을 여는 녹이 아니라, 남이 열어 준 문으로 들어가는 녹이었다.


한 글자

진단의 말은 하나씩 들어맞았다.

977년, 여몽정이 장원으로 급제했다. 장제현도 같은 해 급제했지만 순위는 여몽정보다 뒤였다. 여몽정은 988년에 재상이 되었고, 그 뒤로 재상 자리에 세 번이나 올랐다.

재상이 된 여몽정은 스승을 천거해 교서랑(校書郎) 자리에 앉혔다. 궁중의 책을 교정하는 벼슬이다. 곽연경이 처음으로 벼슬길에 든 것이다.

몇 해 뒤 장제현도 재상이 되었다.

장제현이 보기에, 스승이 서고에 앉아 남의 책 글자나 고치고 있는 것은 너무 초라했다. 어느 날 밤 장제현은 아들을 불러 일렀다.

"주청서를 하나 써라. 곽 선생을 경관(京官)으로 천거하는 글이다."

경관은 도성에서 품계를 받는 벼슬이다. 한 사람의 관리로서 제대로 대접받는 자리였다.

그런데 아들이 붓을 들고 쓰다가, 경관이라고 써야 할 자리에 직관(職官)이라고 적었다. 직관은 흔히 지방 관아의 실무를 맡는 자리를 가리켰다. 경관보다 한 단 아래다.

재상의 하루는 바쁘다. 장제현은 아들이 쓴 글을 꼼꼼히 들여다보지 않고 그대로 올렸다. 황제는 재가했다. 곽연경은 직관이 되었다.

여군이 재상이 되어야 벼슬길에 들고, 장군이 재상이 되어야 벼슬 자리 하나를 얻는다. 진단이 낙양에서 한 말 그대로였다.

장제현은 나중에 잘못된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미 황제가 재가한 일이었다. 그는 한숨만 쉬었다.

곽연경은 그 벼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남은 사람들

여몽정은 1011년에 세상을 떠났다. 장제현은 그보다 몇 해를 더 살고 1014년에 눈을 감았다. 급제 순위는 뒤였지만 복과 녹은 더 길 것이라던 말도 그렇게 맞았다.

곽연경의 문하에서 재상이 다섯 나왔다. 그 다섯 재상의 스승이 받은 것은 책 교정 자리 하나와, 한 글자가 틀린 벼슬 하나였다.

그 주청서는 장제현의 뜻으로 시작되어 아들의 손으로 쓰였다. 곽연경도 진단도 그 종이에 손을 댄 적이 없다. 그런데 그 종이는 진단이 오래전 낙양에서 말한 바로 그 자리에 가서 멈추었다.

장제현이 그 주청서를 다시 고쳐 올렸다는 이야기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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