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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만 끝나면 쉬려고 했는데, ‘이것’이 계속 바뀐다

금요일에 큰일 하나를 끝냈다.
6주 동안 붙잡고 있던 보고서를 보냈다.

드디어 끝났다.
이번 주말에는 아무것도 안 할 생각이다.

배우자에게 말한다.
“이제 좀 살겠다.”

배우자가 대답한다.
“잘됐다. 세탁기에서 이상한 소리 나.”

왜 잘된 것인지 잠깐 생각한다.
내가 한가해졌다는 소식을 세탁기에도 전달한 모양이다.

탈수할 때마다 세탁기가 앞으로 나온다. 세탁기가 의식이 생겼나? 아니면 돌이 되었나, 이제 걷기 시작하네

이제는 세탁기도 독립할 때가 된 것 같다.
내 손을 벗어났다.

수리 예약을 잡았다.
토요일 오전에 기사님이 오신단다.

어차피 집에만 있을 것이니 괜찮다. 쇼파 자리 예약해놨다. 주말 쇼파 3칸짜리 내것.
기사님이
이것만 해결하면 정말 쉴 수 있다.
역시 "기사"야... 왕자님을 구하러 온 기사

그때 학교 알림이 온다.
월요일까지 아이 준비물을 보내달라고 한다....
이건 애 엄마 일이지만,
재수없게 내가 먼저 봐 버렸다.
그 본것을 또 아이에게 들켰다.

아이가 말한다.
“찰흙 있어야 돼.”

집에 있지 않냐고 물으니 대답한다.
“그건 다 섞어서 갈색 됐어.”

음... 그냥 한색으로 뭐 하면 안되니?
나 어릴때 찰흙은 다 흙색이었어....

인생도 요즘 대충 그런 색이다... 똥같은 흙색

당일 새벽 배송으로 찰흙 살수 있나 인공지능에게 물어본다.

젠장

우리는 일을 하나 끝내면 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생활은 그 일을 끝내는 동안에도 다음 일을 만들고 있다.

그래서 할 일 목록을 쓴다.

보고서 제출.
세탁기 수리.
찰흙 구매.
자동차 점검 예약.
부모님 병원 일정 확인.
...

하나씩 지우면 된다.
다 지우고 편하게 쉬면 된다.

요즘 스마트폰에 할일 목록 적으면
지가 알아서 알림 띄워줘서 좋다.

저녁에 보니 3개를 지웠다.
그런데 7개가 추가됐다.

분명 열심히 살았는데.
할 일 목록만 나보다 빨리 성장한다.
주식 계정이 이렇게 성장하면, 벌써 은퇴했겠다.

지우는 재미라도 있어야 하니 이미 한 일도 적는다.
밥 먹기.
샤워하기.
간식먹기
치킨 먹기
맞집 검색하기

적자마자 지운다.
이런 실적이라도 있어야 오늘을 버틸 수 있다.
마침내 처리한 일이 더 많아졌다.
뿌듯해서, 눈물이 다 난다.

누구나 일이 정리된 시간을 바란다.
밀린 연락도 없고.
돈 나갈 곳도 없고.
집안에 고장 난 것도 없고.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시간.

그런데 그 조건을 모두 만족해야 쉬겠다고 하면, 쉬는 날짜를 잡기가 어렵다... 이럴때 이야기한다. 독신이 최고야

일을 끝내면 집안일이 보인다.
집안일을 끝내면 한동안 못 챙긴 사람이 떠오른다.
안부를 묻고 나면 부탁이 하나 생긴다.

그래서 잠깐 나쁜 생각도 한다.
안부를 너무 구체적으로 물었나.

“잘 지내?”
여기서 끝낼 것을.
“뭐 도와줄 일 없어?”까지 갔다.
앞으론 금지어로 "뭐 도와줄것 없어" 설정해야 겠다.
나가지 않게

말도 추가 옵션을 조심해야 한다.

명리에서 관성의 책임과 기준이 앞서는 장면을 생각해볼 수 있다.

맡은 것은 끝내야 한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
미뤄둔 일이 있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다.

이 힘 덕분에 생활이 유지된다.
누군가 예약하고.
납부하고.
기한을 기억해서 일이 넘어간다.

그런데 책임질 일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아직 쉬면 안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소파에 앉았는데 빨래가 보인다.
빨래를 개고 나니 바닥이 보인다.
바닥을 닦으니 창문이 보인다.
창문을 닦고 보니, 변기가 보인다.
변기를 닦고 보니, 샤워부스의 물때가 보인다.

집이 나에게 계속 다음 문제를 출제한다.
평수 작은 집으로 이사하면 시험 범위도 줄어들까.

책임감이 있다는 것과, 모든 문제가 사라질 때까지 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편인의 생각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문제까지 붙잡는 장면도 있다.

세탁기를 고쳤다.
그런데 냉장고도 산 지 오래됐다.
보일러는 괜찮나.
자동차에서 지난번에 들린 소리는 뭐였지.

오늘 고장 난 것은 세탁기 하나였다.
머릿속에서는 가전제품과 자동차가 단체로 퇴직을 준비한다.
아니... 한번에 그러지 말라고, 순서대로 퇴직하라고
명퇴하긴 이르다고

미리 살피면 도움이 될 때가 있다.
다만 지금 확인할 일과 언젠가 생길 수도 있는 일을 전부 오늘의 걱정으로 받아오면, 수리가 끝나도 마음은 계속 고장 난 곳을 찾는다.

기사님은 돌아갔다. 주말에 고생하셨다고, 콜라도 한잔 드렸다.
그런데,
나는 아직 점검 중이다.

좋은 운을 기다릴 때도 비슷한 기대를 품을 수 있다.

이 시기만 지나면.
다음 대운이 오면.
일이 좀 잘 풀리기 시작하면.

그때는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무서워서 점은 못보겠다.
담 대운도 개힘들다고 할까봐
다다음 대운은 더 힘들다고 할까봐

모르면 희망이라도 ...

명리에서 운의 변화를 살핀다고 해서, 어느 시기부터 생활의 잡무가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다.
기회가 늘면서 챙길 일이 많아질 수도 있다.
일이 잘돼서 사람을 뽑으면, 이제는 그 사람의 급여와 일정도 생각해야 한다.

예전에는 손님이 없어서 걱정했다.
이제는 손님이 몰려서 점심을 못 먹는다.

좋아진 것은 맞다.
배고픈 것도 맞다.

운이 좋다는 말이 내 대신 밥을 먹어주지는 않는다.

물론 모든 문제를 그냥 받아들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매번 남이 만든 일을 대신 수습하거나, 고쳐야 할 조건을 계속 견디는 것까지 생활의 일부라며 참을 필요는 없다.

나눌 일은 나누고.
반복되는 문제는 원인을 보고.
내가 맡지 않아도 되는 일은 돌려줄 수 있다.
말은 쉽다.

또 미뤄도 되는 일과 미루면 더 커지는 일도 구분해야 한다.

물 새는 곳을 두고 마음을 내려놓으면.
아랫집에서 마음을 올려보낸다.
대체로 전화로 오거나, 문을 발길질 하기도 한다. 너무 오래 없는 척한것 들켰나보다.

반면 수건 색을 오늘 결정하지 못했다고 내일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
지난번에 2시간 비교했던 그 수건이다.
아직도 장바구니에 있다. 나중에 몰래 부인 쇼핑앱에 장바구니에 넣어야 겠다.
집에 있는 수건으로 그동안 잘 닦았다.

재성의 현실적인 판단으로 보면, 문제의 개수보다 실제 비용과 기한을 살필 수 있다.

지금 처리하지 않으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오늘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은 얼마인가.
직접 해야 하는가.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가.

모든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결국 무엇부터 해야 할지 정하기 어려워진다.

그리고 식신의 누림도 생활 안에 자리가 있어야 한다.
할 일을 전부 끝낸 사람에게만 주는 상처럼 두면, 맛있는 밥도 산책도 자꾸 뒤로 밀린다.

생활을 유지하는 일에는, 그 생활을 잠깐 즐기는 시간도 들어간다.

머리로는 안다.
그런데 막상 앉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다.
몸도 불편해진다.

쉬는 동안 누군가는 뭔가를 하고 있을 것 같다.
내가 놓친 일이 있을 것 같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 오히려 피곤하다.

그래서 휴대폰으로 정리 잘하는 사람의 영상을 본다.
쉬면서 생활을 개선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영상 속 집은 깨끗하다.
수납함도 통일돼 있다.
라벨도 붙어 있다.

우리 집이 갑자기 더 어수선해 보인다.
수납함을 주문한다.

쉬려고 누웠는데 배송받고 정리할 일이 생겼다.
젠장 수납함 조립식이었다. 내가 조립하고, 생긴 쓰레기도 분리수거해야 한다.
역시 나는 가만히 있어도 일을 만든다.

토요일, 세탁기 수리가 끝났다.
기사님이 돌아가고 배우자가 묻는다.

“이제 커피 마시러 갈까?”

습관처럼 대답한다.
“이것만 하고.”

배우자가 묻는다.
“이번에는 뭔데?”

이번에는 뭔데.
아주 정확한 질문이다. 매번 나는 무언가 하고 있으니까

지난주에는 보고서였다.
오늘 아침에는 세탁기였다.
지금은 현관에 놓인 택배 상자다.

이것만 치우면.
분리수거까지 하면.
나가는 김에 찰흙도 사고.

커피 한 잔 마시러 가는 길에 업무가 3개 붙었다.

그래도 나간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받는다.
잠깐 좋다.

배우자가 말한다.
“이렇게 나오면 좋잖아.”

맞다.
모든 일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커피는 마실 수 있다.
컵을 내려놓고 잠깐 창밖을 본다.

그러다 휴대폰을 켠다.
할 일 목록에 적는다.

주말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기.

알림도 설정한다.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

배우자가 화면을 보고 묻는다.
“쉬는 것도 숙제로 만들었어?”

나 커피 마셨으니까, 쉰것 맞지?

일단 이번 주 것은 완료 표시를 했다.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 좋아요 8
이 주제, 내 사주로

글로 익힌 원리를 본인 명판에 직접 적용한 정밀 진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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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答 5
  • 염화소녀_(구)남궁현자·

    ㅋㅋㅋㅋ"극"공감 하고 갑니다.

  • 익명.·

    ㅋㅋㅋㅋㅋㅋ

  • Solara_발렌티노·

    돌이 되었나 걷기 시작하네ㅋㅋㅋㅋ 재밌는 글 감사합니다

  • 키네시스·

    감사합니다

  • 테레아·

    제 얘긴 줄.. 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