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들은 같이 나가자고 했는데, 사직서는 나만 냈다
회사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
상사에게 한소리 듣고 동료들과 술을 마셨다.
“이 회사는 답이 없어.”
“우리 정도면 밖에서도 먹고살지.”
“너 나가면 나도 나간다.”
술이 들어갈수록 서로의 능력이 좋아졌다.
친형제같은 느낌이다. 든든하다.
오후까지는 보고서 때문에 혼났는데, 밤 11시에는 업계를 뒤집을 인재 세 명이 앉아 있었다.
집에 와서 배우자에게 이야기했다.
배우자가 묻는다.
“다음 일은 정했어?”
“생활비는 얼마나 버틸 수 있는데?”
“그 사람들도 정말 나간대?”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다.
회사에서도 인정 못 받았는데 집에서도 이런다.
“당신은 왜 항상 안 되는 쪽으로만 생각해?”
다음 날 사직서를 냈다.
동료들에게 알렸다.
“나 질렀다.”
잠시 조용해지더니 한 사람이 말한다.
“와, 너는 진짜 추진력 있다.”
다른 사람도 말한다.
“나는 애가 있어서 바로는 어렵고.”
이쪽도 애가 있다.
어제는 아무도 자녀가 없었던 것 같다.
함께 화가 났다는 것과, 함께 책임지기로 했다는 것은 다른 일이다.
명리에서 기신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대개 피하고 싶은 것을 떠올린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
싫은 일.
처음부터 불편한 관계.
그런데 기신의 작용이 처음부터 불쾌하게 느껴지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그래서, 늘 이야기하는게, 끌리는대로 살면 안된다. 안좋은 운이 안 좋은 이유는 내가 끌리는대로, 내 본능대로 살다보니까, 안 좋아지더라 인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방식으로 들어오면, 반항부터 하겠지. 안 좋은 운이 꼭 불가항력의 사건으로 무너지는게 아니란 이야기다.
내 억울함을 알아준다.
내 판단이 맞다고 한다.
우리 함께하자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몰라본 내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에는 마음이 편하다.
문제는 그 편안함을 얻으려고 무엇을 내놓게 되는가다.
기신은 단순히 내가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내 구조에서 부담을 키우거나 필요한 작용을 해치는 쪽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끌린다고 용신인 것도 아니고, 듣기 싫다고 기신인 것도 아니다.
당장 기분 좋은 말이 나중에 감당할 일을 늘릴 수 있다.
비겁은 나와 같은 오행의 힘이다.
나와 나란히 선 사람, 동료와 친구, 함께 버티는 힘으로 읽는다.
동시에 자기주장과 경쟁, 같은 몫을 취하려는 움직임도 여기에 들어간다.
이 비겁이 필요한 구조라면, 혼자서는 못 버티던 일을 함께 감당하게 해줄 수 있다.
하지만 비겁이 과해 균형을 해치거나 필요한 재를 다투는 쪽으로 작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 편이 늘어났다고 좋아했는데.
실제로는 내 흥분과 충동에 찬성하는 사람만 늘어났을 수도 있다.
퇴사를 말리는 배우자는 싫은 말을 했다.
같이 나가자는 동료는 듣고 싶은 말을 했다.
한쪽은 다음 달 생활비와 아이 학원비를 물었다.
다른 쪽은 내 가능성과 용기를 칭찬했다.
그런데 나는 현실을 묻는 사람을 적으로 보고, 기분을 북돋아주는 사람을 내 편으로 골랐다.
비겁 기신을 “친구에게 당하는 사주”라고만 외우면 이 부분이 빠진다. 단순히 동업하지 마세요로 판정하면 안되는 이유다.
왜 그 말에 움직였는지.
어떤 확인을 생략했는지.
내가 무엇을 얻고 싶어서 그 관계에 들어갔는지까지 보아야 한다.
비견의 동일시가 강하게 작동하는 장면이라면 이런 말이 힘을 얻는다.
“우리 같은 사람끼리는 알아.”
“내가 너를 모르냐.”
나와 비슷한 사람이니 내 사정도 알 것 같다.
내 사정을 아니까 내게 맞는 판단도 해줄 것 같다.
하지만 같이 상사 욕을 잘한다고, 서로의 생활비까지 아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비슷하다고, 와이프도 비슷한것은 아니다.
그 사람은 퇴사하면 부모님 건물에 사무실을 낼 수 있다.
나는 퇴사하면 일단 거실 한쪽을 치워야 한다.
그것도 배우자가 허락해야 한다.
겁재의 경쟁이 자극되는 장면에서는 다른 말이 들어온다.
“걔도 하는데 네가 왜 못 해?”
“너 원래 이렇게 겁이 많았어?”
처음에는 사업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새 사업성보다 내가 겁쟁이인지 아닌지 증명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계약서를 검토하던 사람이 자존심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숫자는 아직 안 맞는데.
기분은 이미 서명했다.
비겁이 기신으로 작용할 때 살펴볼 것은 사람 수만이 아니다. 관계 안에서 내 판단이 어떻게 바뀌는가다.
물론 친구가 전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가족의 말이 언제나 옳다는 뜻도 아니다.
가족도 무책임하게 부추길 수 있고, 친구가 가장 정확하게 말려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호칭이 아니다.
비겁을 단순하게 동료, 친구, 또래로만 본다면, 그것은 하수인 것, 비겁의 모습으로 찾아오는 모든것은 비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15살 연상이라도, 우리끼리... 우리가 남이가 ?
그러면 비겁이 될 수 있단 이야기다.
그래서
내가 반대했을 때도, 싫은 말 해도 관계가 유지되는지.
좋은 결과만 말하는지, 손해도 함께 계산하는지.
함께하자는 사람이 자기 시간과 돈도 실제로 내놓는지다.
그걸로 비겁이 도움이 되고 안되고를 판정하고
도움은 평생 고정이 아니다. 어떤 시점은 도움이 되고, 어떤 시점은 배신하고 그런다.
비겁쟁재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재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빼앗긴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일간과 비겁의 힘, 재의 상태, 식상으로 이어지는지, 관살의 제어가 필요한지와 가능한지, 운에서 무엇이 더해지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관성이 필요하다고 해서 무조건 규칙을 늘리면 되는 것도 아니다.
명식의 조건을 먼저 보아야 한다.
다만 생활에서는 역할과 부담을 명확히 하는 행동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같이하자”는 말을 들었다면 물어본다.
누가 언제 시작하는지.
각자 무엇을 맡는지.
잘 안되면 어디까지 감당하는지.
여기서 갑자기 말이 흐려지는 사람도 있다.
“우리 사이에 벌써 그런 것까지 따지냐?”
벌써가 아니다.
아직 사직서를 안 냈으니 지금 따질 수 있는 것이다.
퇴사하고 나면 질문의 어조부터 달라진다.
“너 그때 같이한다고 했잖아.”
상대는 기억을 수정한다. 그래서 녹음을 했어야 했나?
“내가 응원한다고 했지, 당장 한다고 했냐?”
이런 일을 겪고도 비슷한 관계로 돌아갈 수 있다.
사람만 바뀌고 들어오는 말은 같다.
“네 능력을 내가 알아.”
“이번에는 진짜야.”
지난번에 잃은 돈도 아깝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는 사실도 인정하기 싫다.
이번에는 제대로 성공해서 지난 선택까지 맞았다고 만들고 싶어진다.
그래서 같은 종류의 말에 다시 움직인다.
구덩이가 새로 생긴 줄 알았는데, 전에 빠졌던 곳에 간판만 바뀌어 지난번 구덩이 아님 이렇게 있다.
기신을 안다는 것은 그런 순간에 자기 반응을 알아보는 데도 쓸모가 있다.
나는 왜 이 말을 들으면 확인을 멈추는가.
왜 만류는 모욕처럼 들리고, 부추김은 신뢰처럼 들리는가.
그렇다고 기신을 한 번 깨달으면 그 작용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반복하던 선택을 조금씩 다르게 다루는 것이다.
다음 술자리에서도 누군가 말한다.
“너 나가면 나도 나간다.”
이번에는 감동하기 전에 물어본다.
“언제?”
"와이프는 찬성해?"
“아니, 그건 상황을 봐야지.”
나도 상황을 보기로 한다.
일단 술값부터 나눠 내자고 이야기를 해본다.
내 편이라는 말은 들었다.
이제 자기 몫도 내는지 볼 차례다.
상대가 물어본다.
"니가 사는것 아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