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은 답도 안 했는데, 혼자 가격을 깎았다
견적서를 보냈다.
작업 시간도 계산했다.
수정할 수고도 생각했다.
이 정도는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고객이 읽고 답이 없다.
십 분쯤 지나자 자기 견적이 갑자기 비싸 보인다.
너무 세게 불렀나?
다른 사람한테 맡기려나?
결국 메시지를 하나 더 보낸다.
“예산이 부담되시면 조정 가능합니다.”
고객은 회의 중이었을 수도 있다.
아직 비싸다는 말도 안 했다.
그런데 혼자 협상해서 혼자 졌다.
답장을 기다리는 불편함을, 자기 돈으로 해결한 것이다.
이런 선택은 생각보다 많다.
독촉하기 미안해서 대금 확인을 미룬다.
어색해질까 봐 부탁을 하나 더 받는다.
평가받기 두려워 완성한 결과물을 계속 고친다.
이유는 제법 괜찮다.
스스로 설득하기위해서 먼 이유든 못만들까?
관계를 위해서.
완성도를 높이려고.
신중하게 하려고.
그런데 한번 물어볼 일이다.
지금 일을 개선하고 있나.
아니면 내 기분을 빨리 편하게 만들고 있나.
견적을 낮추는 것도 필요할 때가 있다.
작업량이 줄었다.
일정에 여유가 생겼다.
상대가 원하는 범위가 달라졌다.
그러면 다시 계산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 조건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가격부터 낮췄다면?
작업비가 아니라 불안함을 할인해준 셈이다.
명리에서 식상생재(食傷生財)를 이야기한다.
식상은 내가 만들어내는 기술과 표현, 결과물이다.
그것이 현실의 수요와 만나 재로 이어지는 흐름을 본다.
그런데 잘 만드는 것과 값을 받고 거래하는 것은 다르다.
칭찬받을 때까지는 편하다.
“정말 잘하시네요.”
돈 이야기가 나오면 상대는 고민한다.
비교하고, 필요를 따지고, 이거 사면 남편이 뭐라고 할까?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 시간을 못 견뎌서 가격을 낮추고 일을 더 얹어주면, 실력은 있어도 자기 몫이 줄어든다.
식상생재는 ‘잘하면 돈이 된다’로 끝나는 말이 아니다. 만들어낸 것이 어떤 조건으로 재에 이어지는지도 봐야 한다.
그렇다고 불편함을 무조건 무시하라는 뜻은 아니다.
상대가 약속을 반복해서 바꾼다.
대금 이야기를 피한다.
요구가 계속 늘어난다.
그때의 불편함에는 확인할 일이 있다.
반면 답장이 늦다는 이유로 혼자 거절당한 기분이 들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둘을 나누어 보자는 것이다.
고객이 비싸다고 했나.
내가 비싸다고 할 것 같아서 겁이 났나.
실제 조건이 바뀌었나.
내 기분만 바뀌었나.
기분이 나쁜 상태에서도 괜찮은 선택을 할 수 있다.
마음이 편해진 뒤에만 일하려면, 견적 하나 보내는 데도 날씨와 운세가 다 맞아야 한다.
기분이 좋을 때도 조심할 것은 같다.
나를 인정해준다.
말이 잘 통한다.
같이 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
그래서 비용과 일정은 나중에 정하자고 한다.
몇 달 뒤에는 그 좋은 분위기를 깨기 싫어서 추가 작업비를 말하지 못한다. 이미 손실구간에 들어왔는데, 야근하고, 돈은 못 벌고 있다.
친절한 만남의 기념비를 자기 야근으로 세우는 중이다.
감정이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감정을 편하게 만드는 일을 거래 조건보다 먼저 처리하는 것이 문제일 수 있다.
그러니 견적을 보냈다면 언제까지 검토할 수 있는지 물어두면 된다.
조정 요청이 오면 무엇을 함께 바꿀지 의논하면 된다.
불안하다고 미리 양보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래도 계약이 안 될 수 있다.
모든 거절을 막을 수는 없다.
거절당하지 않으려고 조건을 전부 내주면, 계약하고 나서 내가 그 일을 거절하고 싶어진다.
다음 견적을 보낸 뒤에도 답장은 늦다.
또 메시지를 쓴다.
“조정 가능하니…”
이번에는 지운다.
잠시 뒤 연락이 온다.
“검토하고 내일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직 계약된 것은 아니다.
불안함도 조금 남아 있다.
그래도 오늘은 상대의 요구를 듣기도 전에, 내 몫부터 깎지는 않았다.
"견적서 금액이 처음 보낸 그대로다."
물론 내일이 어떨지는 모르겠다만, 오늘 잠 잘자면 그걸로 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