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가라앉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살인상생으로 읽는 정서적 안정감
요즘 사람을 고르는 기준으로 정서적 안정감이라는 말이 자주 오르내린다.
만나면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 곁에 있으면 가라앉는 사람.
그런데 이 말을 쓰는 사람 열에 아홉은 가장 얕은 층에서 멈춘다.
상대가 하는 말에 맞장구를 쳐주고, 듣기 좋은 말을 골라 건네고, 우는 사람 옆에서 휴지를 뽑아 주는 것.
이것을 안정감을 주는 일이라고 믿는다.
사회학에서는 이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감정 노동(emotional labor)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앨리 혹실드(Arlie Hochschild)가 1983년에 펴낸 책 관리되는 마음(The Managed Heart)에서 처음 정리한 개념이다.
항공사 승무원들이 어떤 손님 앞에서도 웃어야 하는 상황을 오래 관찰하고 붙인 이름이다.
겉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자기 속내는 누르고, 상대가 기대하는 표정을 만들어 내는 일.
이 일은 하는 사람의 기운을 빼놓는다.
받는 쪽에도 남는 것이 없다.
값싼 위로는 물가가 오른 뒤의 지폐와 같다. 장수는 많은데 살 수 있는 것이 없다.
반면에 정말로 사람을 붙드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듣기 좋은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해도 방 안의 공기가 가라앉는다.
사람들은 이런 이에게 약한 부분을 내보이고, 어려운 싸움을 함께 하겠다고 나선다.
이것이 진짜 안정감이다.
이 글은 그 안정감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뇌과학과 명리학, 두 축으로 따라가 본다.
두 축이 가리키는 자리가 같다.
먼저 사람이 무너질 때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부터.
두려움, 불안, 분노, 슬픔이 일정 선을 넘으면 뇌의 깊은 곳에 있는 편도체(amygdala)가 먼저 켜진다.
편도체가 전력으로 돌기 시작하면, 생각을 맡은 앞이마 쪽의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은 전기가 끊긴 것처럼 기능이 떨어진다.
심리학자 대니얼 골먼(Daniel Goleman)은 1995년 책 감성지능(Emotional Intelligence)에서 이 상태를 편도체 납치(amygdala hijack)라고 불렀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단순하다.
감정에 잠긴 사람은 그 순간 이성이 꺼져 있다.
옳은 말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논리 연산이 돌아가지 않는다.
이때 옆에서 "좋은 쪽으로 생각해", "그게 뭐 그리 큰일이야"라고 말하면 어떻게 되는가.
말하는 쪽은 격려라고 생각한다.
듣는 쪽은 두 가지를 동시에 받는다. 내 감정이 부정당했다는 것, 그리고 내가 덜 강하다는 지적.
불이 난 집에 대고 불이 왜 났는지 강의를 하는 셈이다.
명리학으로 옮기면 이 장면은 어떤 구조인가.
감정이 사람을 덮치는 것은 칠살(七殺)이 일간(日干)을 치는 자리다.
칠살은 나를 극하는 오행 가운데 음양이 같은 쪽이다. 정관(正官)이 규칙과 질서로 나를 다스린다면, 칠살은 사정을 봐주지 않고 곧장 들어온다.
밖에서 오는 압박, 갑작스러운 사고, 관계의 파탄, 돈의 손실. 팔자에서 이런 것은 대체로 칠살의 얼굴로 온다.
칠살이 제어 없이 일간을 때리면 일간은 굳는다.
몸이 굳고 판단이 멈추고 눈앞의 위협 하나만 보인다.
편도체가 켜지고 전전두엽이 꺼지는 장면과 정확히 겹친다.
그러면 팔자에서는 이 살을 무엇으로 다루는가.
세 가지 길이 있다.
식신(食神)으로 살을 제어하는 식신제살(食神制殺), 인성(印星)으로 살의 힘을 돌려 일간을 살리는 살인상생(殺印相生), 그리고 합으로 살을 묶는 합살(合殺).
안정감의 깊이를 가르는 것이 바로 이 가운데 어느 길을 쓰느냐다.
보통 사람이 본능적으로 꺼내 드는 것은 식상(食傷)이다.
"네가 이렇게 했어야지", "그 사람한테 이렇게 말해", "이 일의 핵심은 이거야, 내가 정리해 줄게."
말로 상황을 정리하고 해결책을 내놓는 것은 식상의 일이다. 특히 상관(傷官)이 그렇다.
문제는 순서다.
살이 아직 살아서 날뛰는데 상관이 앞으로 나서면, 상관은 살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남아 있던 정관(正官)까지 친다.
정관은 그 사람의 질서다.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자존, 상황을 붙들고 있던 마지막 틀.
상관견관(傷官見官)이 되면 그 틀이 깨진다.
무너진 사람에게 곧바로 해결책을 던지는 것이 왜 모욕이 되는지가 여기서 설명된다.
해결책을 내놓는 순간 속으로 전해지는 말은 이것이다.
"내가 너보다 낫다. 네 고통은 내 눈에는 풀이가 뻔한 기술 문제다."
상대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약한 순간을 밟고 올라서서 내 우위를 확인하는 것이다.
남자들이 특히 이 실수를 자주 한다. 문제를 풀어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신제살은 식신이 뿌리를 두고 살보다 힘이 있을 때만 성립한다.
뿌리 없는 식상이 사나운 살을 건드리면 살은 더 사나워진다. 명리에서 여러 번 확인되는 규칙이다.
상대가 아직 붙잡을 것이 없는 상태라면, 이때의 조언은 뿌리 없는 식상이다.
깊은 안정감은 다른 길로 간다.
살인상생이다.
인성은 나를 생하는 오행이다. 받아들이는 힘, 품는 힘, 배움과 보호의 별이다.
살인상생의 원리는 이렇다. 칠살은 인성을 생한다. 인성은 일간을 생한다. 그러니 인성이 살아 있으면 나를 치러 온 살의 힘이 인성을 거쳐 오히려 나를 살리는 힘으로 바뀐다.
들어온 압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방향이 바뀐다.
이 인성을 상대에게 빌려주는 것이 안정감의 핵심이다.
뇌과학에서는 같은 것을 협동 조절(co-regulation)이라고 부른다.
상대의 뇌가 혼란에 빠졌을 때, 내가 그 뇌를 고치려 드는 것이 아니라, 잘 돌아가고 있는 내 전전두엽을 잠시 바깥에서 빌려주는 것이다.
실험으로 확인된 바가 있다.
2006년 심리과학지(Psychological Science)에 실린 제임스 코언(James Coan), 힐러리 셰퍼(Hillary Schaefer), 리처드 데이비드슨(Richard Davidson)의 연구다.
결혼한 여성들에게 곧 전기 자극이 온다는 신호를 주고 뇌를 촬영했다.
혼자 있을 때 위협에 반응하는 뇌 부위가 가장 크게 켜졌다. 낯선 사람의 손을 잡고 있을 때는 조금 줄었다. 남편의 손을 잡고 있을 때 가장 크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결혼 생활의 만족도가 높을수록 그 효과가 컸다.
논문 제목이 그대로 손을 빌려주다(Lending a Hand)다.
남편이 무슨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손 하나가 옆에 있었을 뿐이다.
인성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 살이 화한다는 것을 기계로 찍어 보인 셈이다.
상대가 무너질 때 나까지 같이 무너지는 사람은 이 자리에 설 수 없다.
그것은 인성이 아니라 살 하나가 더 늘어난 것이다.
목소리를 낮추고, 자세를 풀고, 상대의 흔들림을 내 쪽에서 받아 안는 것. 이것이 인성이 하는 일이다.
이 자리에 서기 위한 세 가지 일이 있다.
첫째.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일.
2007년 UCLA의 매튜 리버먼(Matthew Lieberman) 연구진이 심리과학지에 발표한 연구가 있다.
사람들에게 화난 얼굴, 겁먹은 얼굴 사진을 보여 주면서 뇌를 촬영했다.
그냥 보기만 할 때는 편도체가 크게 반응했다.
그런데 그 얼굴에 "화남", "두려움" 같은 말을 붙이게 하자 편도체의 반응이 눈에 띄게 내려가고, 대신 전전두엽의 한 부위가 켜졌다.
논문 제목은 감정을 말로 옮기기(Putting Feelings into Words)다.
이 기법을 심리학에서는 정서 명명(affect labeling)이라고 부른다.
명리로 옮기면 이것은 인성의 첫 번째 작용이다.
인성은 앎의 별이다. 살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살은 인성을 생하기 시작한다.
정체 모를 것이 나를 치고 있을 때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때는 같은 살이라도 무게가 다르다.
가장 숨기고 싶고 가장 부끄러운 아픔을 누군가 평가 없이 보고, 그것을 또렷한 말로 옮겨 줄 때, 그 사람은 더 이상 혼자 떠 있는 섬이 아니다.
뇌관이 빠진다. 이성이 천천히 돌아온다.
배우자가 불안해할 때, 아이가 주저앉아 울 때,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마"라는 말을 멈추고 눈을 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 일이 너를 많이 억울하게 만든 것 같다. 네가 쏟은 것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으니까."
본다는 것. 그것이 가장 높은 단계의 치료다.
둘째. 문제를 풀어 주고 싶은 마음을 누르는 일.
앞에서 말한 상관견관을 막는 것이다.
대신 만들어야 하는 것이 있다. 상대의 감정이 들어와 앉을 수 있는 자리다.
영국의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컷(Donald Winnicott)은 이것을 안아 주는 환경(holding environment)이라고 불렀다.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있을 때 아기가 세상의 위협을 자기 대신 어머니에게 맡기는 상태를 관찰하고 만든 말이다.
같은 시기 정신분석가 윌프레드 비온(Wilfred Bion)은 담는 것과 담기는 것(container and contained)이라는 말을 썼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누군가가 대신 받아 담아 두었다가, 견딜 수 있는 크기로 만들어 돌려주는 관계다.
이것이 인성이 살을 화하는 과정 그 자체다.
상대가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껏 부서져도 된다는 것, 당장 강해질 필요도 없고 당장 대책을 세울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
상대의 혼란이 그 자리에 있도록 허락하되, 내가 그 혼란에 삼켜지지는 않는 것.
여기에 필요한 것이 안에 세워진 질서다.
명리로 말하면 일간의 뿌리, 곧 통근(通根)이다.
뿌리 없는 일간은 이런 자리를 만들지 못한다.
상대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 자기가 먼저 흔들린다. 그래서 서둘러 조언을 던진다. 조언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을 빨리 막아서 자기 불안을 가라앉히려는 것이다.
살이 들어오는데 내 일간이 약하면 인성이 있어도 화하지 못하고 나까지 다친다. 팔자를 볼 때 늘 확인하는 규칙이다.
반대로 뿌리 깊은 일간은 살 앞에서 고요하다.
말은 한마디면 된다.
"상황이 아무리 나빠도 내가 여기 있다. 받아 줄 수 있다."
이 자리에서 상대의 감정이 제 갈 길을 다 가고 나면, 해결책은 대개 그 사람이 스스로 찾는다.
살이 인성을 거쳐 일간으로 돌아오면 일간은 다시 식상을 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셋째. 이야기의 각도를 바꾸는 일.
감정이 가라앉은 다음에야 들어가는 단계다. 순서를 바꾸면 앞에서 말한 상관견관이 된다.
이 단계에서 하는 일은 무너진 자리에서 질서와 주도권을 되찾아 주는 것이다.
사람이 절망에 빠지는 것은 실패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이 일을 망쳤다"에서 멈추지 않고 "나는 망한 사람이다"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명리에서 이것은 사건인 칠살이 일간의 자리까지 밀고 들어와 일간과 한 몸이 되어 버린 상태다.
해야 할 일은 사건과 사람을 다시 떼어 놓는 것이다.
없는 희망을 지어내는 것이 아니다.
손실을 부정하지 않고 상처를 똑바로 보되, 그 상처 안에서 그 사람이 얻은 것을 하나 집어내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잃었는가"에 붙박인 시선을 "이것을 잃으면서 내가 무엇을 얻었는가"로 옮겨 놓는 것.
이것은 인성이 살을 다 화한 다음, 살아난 일간이 다시 식신(食神)을 내는 장면이다.
식신은 살을 제어하고 재성(財星)으로 흐른다. 잃은 자리에서 다음 것이 나오는 통로다.
같은 사실을 다시 말하되 이번에는 논리와 방향이 있는 힘으로 상대의 인식을 받쳐 주는 것.
여기까지 갈 수 있어야 그 사람이 주는 안정감이 깊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많은 사람이 묻는다.
왜 나는 이것이 안 되는가.
답은 명리 규칙 하나로 끝난다.
인성이 살을 화하려면 인성에 뿌리가 있어야 하고 일간이 그 인성을 받을 만해야 한다.
바닥난 통장으로는 남에게 돈을 빌려줄 수 없다.
안정감은 약한 사람끼리 서로 몸을 비벼 추위를 견디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남는 것이 있는 사람만 꺼내 줄 수 있는 것이다.
속이 결핍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사람은 남의 살을 받아 줄 수 없다. 받는 순간 자기 살이 된다.
그래서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남에게 말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읽고, 겪고, 자기 기준을 세우고, 혼자서 위기를 넘겨 본 경험을 쌓아 일간에 뿌리를 두는 것이다.
밖에서 무엇이 와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갖는 것이다.
안의 것이 넘칠 만큼 차야, 그제야 힘들이지 않고 곁의 사람에게 그 안정이 번진다.
장자는 인간세(人間世)에서 이렇게 썼다.
허실생백(虛室生白). 빈 방에 흰 빛이 생긴다.
방을 물건으로 가득 채우면 빛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방을 비워야 빛이 든다.
자기 불안으로 가득 찬 사람은 남의 감정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시장에 나와 있는 이른바 감성 화법, 공감 대화법 같은 것은 대개 공장에서 찍어 낸 물건이다.
그 말들을 외우는 것으로는 방이 비워지지 않는다.
비워야 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인식의 알갱이를 잘게 다듬고, 남의 입장에 서 보는 능력을 갈고, 이 계산 빠른 세상 속에서도 사람에 대한 연민과 통찰을 놓지 않는 것.
가장 깊은 안정감은 그 사람이 잘될 때 몇 번 손뼉을 쳐 주었느냐로 매겨지지 않는다.
그 사람이 바닥으로 떨어져서 온 세상이 등을 돌렸을 때, 조용히 눈을 마주 보고, 흔들리지 않는 힘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느냐다.
"별일 아니다. 패는 아직 남아 있다. 일어나서 다시 한 판 하자."
이 말이 살아 있는 인성에서 나오는지, 아니면 그저 외운 대사인지는 듣는 쪽이 먼저 안다.
내 팔자에서 인성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지난달에 누군가 무너졌을 때, 나는 인성이었는가, 아니면 살 하나가 더 늘어난 쪽이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