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에 신약이면, 수행이 곧 갑옷이다
사주에 화개(華蓋)를 둔 사람은 대체로 감이 좋다.
남이 던진 말 한마디의 뒤편에 무엇이 깔려 있는지 금방 안다. 방 안 공기가 언제 식었는지도 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는데 혼자 먼저 알아챈다.
문제는 이게 늘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데 있다.
화개는 삼합(三合)의 마지막 글자다.
인오술(寅午戌)이면 술(戌), 신자진(申子辰)이면 진(辰), 사유축(巳酉丑)이면 축(丑), 해묘미(亥卯未)면 미(未). 년지(年支)나 일지(日支)를 기준으로 삼합을 짜서 그 끝 글자를 찾으면 된다. 결과적으로 화개는 언제나 진술축미(辰戌丑未), 곧 묘고(墓庫)에 떨어진다.
묘고는 창고다. 기운이 활개 치는 자리가 아니라 갈무리되는 자리다. 그래서 화개를 두면 밖으로 뻗는 힘보다 안으로 접히는 힘이 강하다. 남들이 시끄럽게 어울릴 때 혼자 한 발 물러나 있는 모양이 여기서 나온다.
임금 행차에 씌우던 화려한 덮개가 화개다. 덮개 아래 있으니 자리는 귀한데, 동시에 세상과 한 겹 막이 쳐져 있다. 이름에 이미 두 가지가 다 들어 있다.
여기에 신약(身弱)이 겹치면 사정이 달라진다.
신약은 일간(日干)의 뿌리가 얕고 도와줄 글자가 적은 상태를 말한다. 인성(印星)도 얇고 비겁(比劫)도 없는데, 관살(官殺)이나 재성(財星)이 무겁게 눌러 오는 짜임이 대표적이다.
이때 화개의 감지력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대로다. 줄어드는 건 그 감지력을 감당할 힘이다.
창문을 활짝 열어 놓았는데 방충망이 없는 셈이다. 바람도 들어오고 벌레도 들어오고 옆집 부부싸움 소리도 들어온다. 들어오는 걸 막을 수가 없으니, 들어온 걸 전부 혼자 소화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사는 모양이 대략 비슷하다.
남이 무심코 흘린 말 한마디를 밤새 굴린다. 다 끝난 관계인 걸 알면서도 몇 년을 못 놓는다. 문제가 생기면 먼저 자기 탓부터 찾는다. 상대 사정을 이해해 주다가 정작 자기 몫은 뒤로 밀어 둔다.
명리로 보면 이건 성격 문제가 아니다.
인성이 약하면 들어온 것을 걸러 저장하는 기능이 약하다. 비겁이 없으면 밀고 들어오는 힘 앞에서 버텨 줄 편이 없다. 식상(食傷)마저 막혀 있으면 안에 쌓인 것을 밖으로 내보낼 통로도 없다.
들어오는 문은 넓고 나가는 문은 좁다. 그러면 안에 고인다. 고인 것이 스스로를 갉아먹는 게 신약 화개의 소모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하고 가야 한다.
화개가 있어서 고독한 게 아니다. 신살(神煞)은 혼자서 길흉을 정하지 못한다.
삼명통회(三命通會)에 이런 구절이 있다.
若四柱不相往來,更五行再無氣象,天乙閒漫,華蓋叠逢,不作飄蓬尋幽之士,必爲九流藝業之人
네 기둥이 서로 오가지 못하고 오행이 기상을 잃은 데다, 천을귀인은 한가롭게 놀고 화개만 거듭 겹치면, 떠돌며 그윽한 것을 찾는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술업과 예능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앞의 조건을 보라. 화개 이야기는 맨 뒤에 나온다. 먼저 나오는 건 네 기둥이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것, 오행이 힘을 잃었다는 것이다.
기운이 넉넉하고 흐름이 트인 사주에서 화개는 그저 깊이다. 학문으로 가고 기예로 가고 통찰로 간다. 화개가 짐이 되는 건 몸이 약하고 흐름이 막혔을 때다.
그러니 화개를 탓할 일이 아니다. 화개는 무늬고, 신약이 바탕천이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명리적으로 가장 정직한 답은 인성과 비겁이 오는 대운(大運)을 만나면 숨통이 트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그 시기가 오면 사람이 단단해지고, 예전 같으면 밤새 굴렸을 말도 그날 저녁에 털어 낸다.
그런데 대운은 십 년에 한 번 바뀐다.
앞으로 칠 년 남았다면 그 칠 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서 수행이 나온다.
수행은 신비한 의식이 아니다. 향 피우고 경전 읽는 걸로 단번에 해결되는 일도 아니다. 인성과 비겁이 사주에서 해 주는 일을 손으로 직접 하겠다는 뜻이다. 방충망을 스스로 달겠다는 것이다.
첫째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두는 일이다.
부동심(不動心)이라 하면 거창하게 들리는데, 실은 남의 말과 표정에 내 기분의 조종간을 넘기지 않는 것이다.
공감은 하되 상대의 감정을 통째로 짊어지지는 않는다. 착하게는 살되 나를 깎아 내면서까지 착할 필요는 없다. 상대의 사정을 아는 것과 그 사정을 내가 책임지는 것은 다른 일이다. 화개를 둔 사람들은 이 둘을 자주 붙여 놓는다.
도덕경(道德經)에 이런 말이 있다.
致虛極,守靜篤
비움을 지극한 데까지 밀고 가고, 고요함을 두텁게 지킨다는 뜻이다.
지킨다는 말이 핵심이다. 고요함은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오는 게 아니라 지켜야 남는다는 뜻이니까.
둘째는 끊고 버리고 떠나는 일이다.
질질 끌기만 하는 인연을 끊고, 소모만 시키는 일을 버리고, 기운만 빼 가는 자리에서 물러난다.
남 눈치 보느라 선을 계속 뒤로 미는 게 신약 화개가 가장 잘하는 짓이다. 마음이 여려서 그렇다. 그런데 여린 사람이 선을 뒤로 밀면 밀리는 건 선이 아니라 자기 자리다.
오래 소모시키는 사람과는 거리를 벌린다. 이건 박정한 게 아니라 자기 관리다. 배가 얇으면 짐을 덜 싣는 게 맞다. 배 두께를 탓하면서 계속 싣다가는 가라앉는다.
셋째는 흩어 놓은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일이다.
밖으로만 뻗어 있던 관심을 안쪽으로 돌린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쏟던 힘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쓴다.
이건 사주로 치면 식상의 통로를 스스로 뚫는 일에 가깝다. 안에 고인 것을 글로 쓰든 손으로 만들든 몸을 움직이든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화개를 둔 사람이 유독 글쓰기나 공부나 기예에서 자리를 잡는 이유가 여기 있다. 안에 고인 게 많으니 내보낼 것도 많다.
화개가 주는 감지력은 원래 재능이다.
같은 방에 있어도 남들이 못 보는 걸 본다. 이건 훈련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다만 그 감지력이 지혜가 될지 약점이 될지는 그 사람이 얼마나 단단한가에 달려 있다.
몸이 약할 때 그 감각은 그대로 상처가 된다. 몸이 단단해지면 같은 감각이 통찰이 된다. 물건은 하나인데 그릇이 다른 것이다.
고독은 화개를 둔 사람이 치러야 할 몫이 맞다.
다만 고독하게 사는 것과 소모되면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앞의 것은 자리고 뒤의 것은 손실이다. 대개는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해서, 남에게 시달리며 사는 걸 두고 나는 원래 외로운 팔자라고 말한다.
외로운 팔자는 남 때문에 밤을 새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