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일
죽는 날짜보다 죽는 자리가 먼저 정해져 있다는 말이 있다. 명리(命理)를 조금 공부한 사람은 이 말을 들으면 코웃음을 친다. 사주 여덟 글자에 무슨 지번 주소가 적혀 있겠는가.
맞다. 적혀 있지 않다. 그런데도 이런 이야기가 수백 년을 살아남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명리에서 말하는 정수(定數)는 사건 자체가 아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이다. 어느 시점이 되면 사람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든다. 평소 같으면 하지 않을 일을 굳이 하고 싶어진다. 그 마음이 발을 옮기고, 발이 옮겨진 자리에서 일이 벌어진다.
그러니까 하늘이 사람을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제 발로 걸어가는데 하필 그 시기에 그 발이 그쪽으로 향한다는 이야기다. 순서가 다르다.
옛 기록에 이런 일이 전한다.
청나라 가경 연간, 소주에 쉰이 넘은 여인이 있었다. 그 시절 쉰이면 노인 축에 든다. 평생 집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이 들어 문득 딴생각이 들었다. 죽기 전에 구경이라는 걸 한 번 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멀리는 못 간다. 전족한 발로 먼 길은 무리다. 그래서 고른 곳이 소주 안에서 가장 이름난 자리, 호구(虎丘)였다.
호구가 어떤 곳인가. 소동파가 소주에 와서 호구를 보지 않으면 그것이 평생의 한이 된다고 적어둔 곳이다. 到蘇州不遊虎丘乃憾事也. 이 한 줄 덕분에 호구는 천 년 가까이 관광객을 끌어모았다.
여인은 매일 같은 말을 되뇌었다.
이 몸이 호구 한 번만 가본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이러니 남편이 지쳤다. 어느 날 웃으며 말했다.
호구가 하늘에 붙어 있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 노래를 부르는가. 가면 될 일 아닌가.
하인을 딸려 보냈다. 여기까지는 흔한 집안 풍경이다. 말리는 사람도 없고, 말릴 이유도 없었다.
여인은 얼마 걷지 않아 천인석에 닿았다. 그 시절 호구에는 절이 있었고 전각들이 늘어서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여인이 말했다.
내가 오고 싶던 곳이 바로 여기다.
작은 발로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올라갔다. 쉰세 계단을 올라 천왕전 아래에 섰다. 고개를 들고 넋을 놓은 채 처마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바람이 한 줄기 지나갔다.
우지끈, 하는 소리가 났다. 대들보가 부러졌다. 전각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여인은 피할 겨를도 없이 그 아래 깔렸다.
평생을 두고 벼르던 그 자리에서,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렇게 됐다.
호구를 한 번 보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던 말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말한 대로 됐는데, 말한 사람이 원하던 방식은 아니었다.
이 이야기를 두고 옛사람들이 남긴 감상은 대개 비슷하다. 갈 때가 되면 안 가던 길도 가게 된다는 것이다.
명리로 보면 이 대목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갈린다.
사주에서 움직임을 담당하는 글자가 역마(驛馬)다. 원래는 관청 사이를 오가던 말과 역참을 가리키는 말인데, 명리에서는 이동, 출타, 자리 옮김을 뜻한다.
평생 문밖을 안 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짐을 싸는 시기가 있다. 대운(大運)이나 세운(歲運)에서 역마가 동할 때가 그렇다. 이때 사람은 이유를 잘 못 댄다. 그냥 답답해서, 그냥 한 번은 가봐야 할 것 같아서라고 말한다.
여기에 충(冲)이 겹치면 더 확실해진다. 충은 두 글자가 정면으로 부딪히는 자리다. 부딪히면 가만히 있던 것이 흔들리고, 앉아 있던 사람이 일어선다. 오래 눌러 살던 사람이 이사를 하고, 잠잠하던 사람이 길을 나선다.
명리를 조금 아는 사람들은 이 시기에 흔히 이렇게 말한다. 올해는 움직임이 있겠네요.
그런데 움직임이 있다는 말과 그 움직임의 끝에서 무슨 일이 있겠다는 말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다. 앞쪽은 어렵지 않다. 뒤쪽은 여덟 글자만 들여다봐서 나오는 물건이 아니다.
그래서 정수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어디로 가느냐까지는 사주에 안 적혀 있는데, 어느 시기에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 기울어지느냐는 꽤 일정한 궤도를 그린다.
명(命)은 그 궤도다. 운(運)은 그 궤도 위를 지나가는 시각이다.
혼자 산에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소식은 해마다 나온다. 사고 자체는 사고다. 다만 매번 같은 대목이 반복된다는 점은 눈에 띈다.
가지 말라고 말린 사람이 있었다. 다른 날로 미룰 수도 있었다. 굳이 혼자 갈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 그 사람은 그렇게 하는 편이 훨씬 좋아 보였다.
무릎을 치게 만드는 지점이 여기다. 위험한 선택을 할 때 사람은 자기가 위험한 선택을 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어느 때보다 마음이 개운하고 판단이 명료하다고 느낀다.
앞의 여인도 마찬가지다. 그 여인이 무리하게 우겼다는 기록은 없다. 남편이 못 이겨 보내준 것이고, 하인까지 딸려 보냈다. 집안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날의 계획은 대단히 합리적이었다.
되짚어 보면 이상해 보이는 것들은 늘 지나간 다음에야 이상해진다.
한 가지 더 짚어둘 대목은 말이다.
도덕경에 多言數窮, 不如守中이라는 구절이 있다.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니 가운데를 지키는 것만 못하다는 뜻이다. 도교 계통의 옛 가르침이 말을 조심하라고 반복해서 이르는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말은 소리로 끝나지 않는다. 같은 문장을 매일 되뇌면 그것이 마음의 방향을 잡는다. 방향이 잡히면 발이 따라간다.
호구를 보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말을 오십 몇 년 만에 처음 품은 소원치고는 표현이 과했다. 그런데 그 여인은 그 문장을 매일 입에 올렸다.
말이 사람을 죽였다고 하면 지나치다. 다만 그 말이 그 사람을 그 계단 위까지 데려간 것은 분명하다.
혹시 그날 여인이 집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대들보는 그래도 부러졌을 것이다. 그 아래 서 있던 사람만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안 가면 되는 것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문제는 그 시기가 되면 아무도 자기를 말리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생 문밖에 안 나가던 사람이 처음으로 밖에 나가겠다는데, 그걸 굳이 막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남편도 웃으면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