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주 나쁜 사주는 없다는 말
역술을 한다는 사람들 입에서 심심찮게 나오는 말이 있다. 좋은 사주 나쁜 사주는 없다는 말이다.
부모가 아이의 생년월일을 적어 들고 와서 이 아이 그릇이 어떠냐고 물으면, 어김없이 댓글이 달린다. 좋은 사주 나쁜 사주가 어디 있느냐고. 다 저마다 쓰임이 있는 법이라고.
듣기에는 따뜻하다. 넉넉하고 어른스러운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조금만 밀어붙여 보면, 이 말은 따뜻한 게 아니라 무책임한 것이다. 그리고 대개는 볼 줄 몰라서 하는 소리다.
생각해 보라. 좋고 나쁨이 정말 없다면, 애초에 이 학문은 무엇을 위해 있는가. 재고 헤아릴 것이 없다면 재는 도구도 필요 없다. 자를 손에 쥐고 있으면서 길고 짧음은 없다고 말하는 셈이다.
건강 하나만 놓고 봐도 그렇다.
몸이 쉽게 상하는 사주가 있다. 남들은 넘어져도 툭툭 털고 일어나는 자리에서, 유독 크게 다치고 오래 앓는 사람이 있다. 어느 한 오행이 지나치게 몰리거나, 형충(刑沖)이 급소를 때리는 자리에 놓이면 몸은 평생 그 대가를 치른다.
치명적인 병을 품은 사주가 있다. 오행이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 순환이 막히면, 그 막힌 곳에서 병이 자란다. 이런 사람 앞에서 좋고 나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눈을 감아 주는 것이지 위로가 아니다.
마음이 늘 가라앉는 사주도 있다. 수기가 과하게 무겁거나 빛이 될 화(火)가 꺼져 있으면, 사는 내내 안개 속을 걷는다. 남들이 웃는 자리에서 혼자 어둡다. 이 사람에게 사주는 다 똑같다고 말해 봐야, 그 말은 그의 아침에 아무것도 바꿔 주지 못한다.
능력과 욕망의 문제로 넘어가면 더 분명해진다.
아무것도 볼 것이 없는 사주가 있다. 특별히 나쁠 것도 없으나, 딛고 올라설 발판도 없다. 평생 무던하게는 살지만, 크게 뻗어 나갈 자리가 애초에 그려져 있지 않다.
반대로 욕망은 하늘을 찌르는데 담을 그릇이 작은 사주가 있다. 재물은 사방에 널려 있는데 그것을 감당할 몸이 없다. 명리에서 재다신약(財多身弱)이라 부르는 자리다. 돈이 눈앞에 산더미인데, 지고 갈 힘이 없어 도리어 그 돈에 깔린다. 성공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 큰데, 성공이 놓인 길목마다 문이 닫혀 있는 사람이 실제로 있다. 부자가 되고 싶은데 부자가 될 길이 처음부터 막혀 있는 사람이 있다.
이걸 두고 다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배고픈 사람과 배부른 사람을 한자리에 앉혀 놓고 다들 밥은 먹지 않았느냐고 우기는 것과 같다.
역사에 한 사람을 세워 본다. 항우(項羽)다.
힘은 산을 뽑고 기세는 세상을 덮는다고 스스로 노래한 사내다. 젊어서 이미 강동의 자제 팔천을 이끌고 진나라를 무너뜨렸고, 한때 천하는 그의 손안에 있는 듯 보였다. 얻고자 하는 마음의 크기로 치면 그를 넘을 자가 드물었다.
그런 그가 마지막에 해하(垓下)에서 사방으로 초나라 노래에 둘러싸였을 때, 이렇게 읊었다. 힘은 산을 뽑고 기세는 세상을 덮었건만, 때가 이롭지 못하니 말조차 나아가지 않는구나.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못한 죄가 아니라고도 했다.
욕망의 크기와 손에 쥘 수 있는 것의 크기가 이토록 어긋난 사람도 드물다. 사마천이 사기(史記)에 이 장면을 적어 두천 년을 건너왔다. 항우의 여덟 글자를 우리가 알 길은 없으나, 그의 삶이 그려 낸 무늬만큼은 또렷하다. 원한다고 다 손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
옛사람들은 이 차이를 모른 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으로 다뤘다.
적천수(滴天髓)는 사주의 맑고 흐림, 곧 청탁(淸濁)을 한 장에 걸쳐 논한다. 그 안에 이런 구절이 있다. 판을 가득 채운 흐린 기운은 사람을 고달프게 한다. 반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맑게 통한 사주는 평생의 부귀가 참되다고 했다. 천 년 전 사람이 이미 맑은 사주와 흐린 사주를 갈라 놓은 것이다.
자평진전(子平眞詮)은 아예 격국(格局)에 높고 낮음, 곧 고저(高低)가 있다고 못 박고, 그 높낮이를 가리는 데 한 장을 통째로 쓴다. 같은 격이라도 어떤 것은 귀하고 어떤 것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이 책은 조금도 에두르지 않는다.
가장 진지하게 이 학문을 판 사람들이야말로, 좋은 사주와 나쁜 사주가 있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히 알고 있었다. 없다고 말하는 쪽은 대개 그 갈피를 짚을 힘이 없는 쪽이다.
그렇다면 왜 없다는 말이 그렇게 흔한가.
첫째는 인정이다. 어린 자식을 안고 온 부모 앞에서 나쁜 사주라고 말하기가 차마 어렵다.
둘째는 발뺌이다. 좋다 나쁘다를 걸었다가 틀리면 책임이 따르니, 처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
셋째는 무지다. 볼 줄 모르니 볼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 셋이 뒤섞여 좋은 사주 나쁜 사주는 없다는 문장으로 굳는다. 따뜻하게 들리지만, 실은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이다.
한 가지는 짚어 두어야겠다.
나쁜 사주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과, 나쁜 사주니 그냥 주저앉으라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바다에 나가는 뱃사람은 물속 어디에 암초가 박혀 있는지를 먼저 안다. 암초가 있다는 말을 저주로 듣지 않는다. 도리어 그 자리를 알기에 배를 돌린다. 자기 사주의 약한 곳을 아는 일도 이와 같다. 도덕경(道德經)은 남을 아는 자는 지혜롭고 자기를 아는 자는 밝다고 했다. 밝다는 것은 좋은 것만 본다는 뜻이 아니라, 어두운 곳까지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없는 것으로 치는 순간, 돌아설 자리도 사라진다. 있는 것으로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그 앞에서 무엇을 할지 궁리라도 해 볼 수 있다.
아이의 사주를 들고 온 부모에게 정말로 해 줄 수 있는 말은, 좋은 사주 나쁜 사주가 없다는 무난한 한마디가 아닐 것이다. 이 아이의 몸이 어디가 약한지,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 무엇을 밀어주면 트이고 무엇을 억지로 시키면 상하는지. 그 자리를 짚어 주는 일이다.
없다고 덮어 주는 손과, 있는 그대로 짚어 주는 손. 그 앞에 앉은 아이에게는 둘 중 어느 손이 실제로 필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