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기 월광보합과 선리기연 — 긴고아를 쓸 것인가
1995년에 이 두 편이 개봉했을 때, 평가는 한쪽으로 기울었다.
제작비가 홍콩 돈으로 육천만 가까이 들어갔는데 홍콩 흥행은 그에 못 미쳤고, 중국 본토에서는 사실상 아무도 보지 않았다. 고전을 함부로 뜯어고쳤다는 비난이 쏟아졌고 문화 쓰레기라는 말까지 붙었다. 주성치가 세운 제작사는 이 작품으로 문을 닫았다. 감독은 낙담해 한동안 홍콩을 떠났고, 참여자 가운데 자기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한 사람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주성치가 남긴 반응은 담담한 쪽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구나, 하는 정도였다.
그로부터 삼십 년이 지난 지금 이 작품은 중화권 영화사에서 신화에 가까운 자리에 놓여 있다. 같은 필름이고 같은 편집이다. 달라진 것은 보는 사람이다.
이 이야기를 명리(命理)의 눈으로 보면 흥미로운 것은 재평가가 아니라 시간차 자체다.
주성치의 명조에서 년간(年干)에 상관(傷官)이 떠 있고 그 아래 지지는 역마(驛馬)의 자리다. 상관은 기존의 형식과 기준을 비틀어 새 형태를 만드는 글자이고, 역마는 한곳에 머물지 않고 밖으로 달려나가는 기운이다. 이 둘이 년주(年柱)에 함께 앉아 있다는 것은 출발점부터 당대의 기준보다 앞에 서 있었다는 뜻이 된다.
상관은 당대의 관(官)을 친다. 여기서 관이란 그 시대가 합의해 놓은 평가 체계이고 장르의 문법이다. 앞서 나간 만큼 세상이 따라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 동안에는 실패로 기록된다.
1996년 말, 이 필름은 북경전영학원에 실패 사례 교재로 들어갔다. 실패를 가르치려고 튼 화면 앞에서 학생들이 다른 것을 읽어냈다. 1997년 무렵부터 청화대와 북경대 게시판에 해석글이 쏟아졌고, 복사한 영상물이 기숙사를 돌면서 한 세대가 이 작품을 다시 열었다.
2001년에 주성치가 북경대 강연에 갔을 때, 학생들이 후현대주의를 들이대며 질문했다. 그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만든 사람은 의도한 적이 없는데 해석은 스스로 자라났다. 이런 여백이 어떻게 생겨나는지가 이 글의 관심사다.
줄거리부터 짚는다.
지존보는 오악산 아래 산적 무리의 두목이다. 실력도 대단치 않고 책임질 것도 없다. 부하들과 어울려 하루하루를 보낸다. 아무 걱정 없는 상태다. 명리로 말하면 관(官)이 없는 자리다. 관이 없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에 백정정이 들어오면서 그가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한다. 서툴고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진짜다. 이 단계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구간이다. 아직 대가는 청구되지 않는다.
월광보합으로 시간을 되돌리다가 그는 오백 년 전으로 떨어지고 거기서 자하선자를 만난다. 두 번째 사랑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값이 붙는다.
우마왕이 자하를 데려가려 하고, 당승 일행도 위험에 처한다. 지존보에게는 이들을 구할 힘이 없다. 힘을 얻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긴고아를 머리에 쓰는 것. 그러면 손오공의 신통력이 돌아온다. 대신 조건이 붙는다. 칠정육욕을 버려야 한다.
여기서 이 이야기의 중심 문장이 나온다. 긴고아를 쓰면 너를 사랑할 수 없고, 쓰지 않으면 너를 구할 수 없다.
이것이 진퇴양난의 정확한 형태다. 흔한 갈등이 아니다. 보통의 딜레마는 둘 중 하나를 고르면 나머지 하나를 잃는다. 여기서는 사랑을 지키려고 선택해야 하는 그 행위가 곧 사랑을 버리는 행위다. 지키는 방법과 버리는 방법이 같다.
명리로 옮기면 이 구조가 한 글자로 정리된다. 칠살(七殺)이다.
칠살은 사람을 짓누르는 압박이면서 동시에 그 사람에게 힘과 지위를 주는 글자다. 여의봉과 긴고아가 한 세트로 딸려 오는 것과 같다. 권능과 굴레가 분리되지 않는다. 대성(大聖)이라는 호칭과 머리를 조이는 쇠테가 같은 물건의 앞뒤다.
주성치의 명조는 관살(官殺)이 사주의 절반을 넘게 차지하고 일간(日干)은 뿌리를 두지 못한 종살(從殺)의 구조다. 관살에 몸을 맡기지 않으면 설 자리가 없는 명이다.
그리고 이런 명에서 재성(財星)은 자기 것으로 남지 않는다. 재가 관살을 생하는 흐름을 타기 때문이다. 사랑이 성취를 키우는 연료로 흘러들어간다. 목생화(木生火)의 순환이 명 안에서 그대로 돌아간다.
지존보가 자하를 구하기 위해 자하를 사랑할 자격을 내놓는 장면은, 이 배치를 이야기로 옮겨 놓은 것에 가깝다. 재가 관으로 흘러가 소진되는 구조를 사람이 겪으면 그렇게 된다.
주성치 본인이 성공을 위해 관계를 접었고 그 뒤로 혼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자기 명의 문법을 이야기로 만들면 이런 모양이 나온다.
그런데 이 작품이 오래 남는 이유는 사랑 이야기여서가 아니다. 어른이 되는 일의 정의를 정확하게 짚었기 때문이다.
지존보는 어린 시절의 우리고 손오공은 그 뒤의 우리다. 여의봉은 책임이고 긴고아는 압력이다. 사회가 어깨에 얹는 것을 받아 드는 순간 힘이 생기고, 동시에 놓아야 하는 것이 생긴다. 놓기 싫어도 놓는다. 놓지 않으면 아무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관이 없던 자가 관을 받아 드는 과정. 명리의 언어로는 무관(無官)에서 종살로 넘어가는 구간이다. 자유롭고 아무것도 아니던 상태에서, 무겁고 무언가인 상태로 건너간다. 건너가면 돌아올 수 없다.
이 작품이 1995년에 코미디로 팔렸다는 점이 문제의 절반이었다. 관객은 웃으러 갔다. 그런데 화면은 정신없이 튀고 시간은 앞뒤로 뒤엉키고 인물은 갑자기 진지해진다. 웃으러 간 사람에게 이것은 산만한 실패작이다.
웃음이 표면이고 그 아래에 다른 층이 깔려 있다는 사실은 웃음을 기대하지 않은 상태에서만 보인다. 나이가 들어 다시 보면 대사 하나하나가 다르게 들린다. 배경에 깔린 선율이 다르게 들린다. 노관정이 부른 주제가가 흐르는 대목에서 우는 사람들은 줄거리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 성벽 장면이 있다.
오백 년 뒤의 세계다. 성벽 위에 석양무사와 이름 없는 여협이 서 있다. 두 사람은 지존보와 자하가 다시 태어난 모습이다. 그런데 이 남자는 옛날의 지존보처럼 머뭇거린다. 말도 못 하고 돌아설 참이다.
성벽 아래를 지나던 손오공이 바람을 일으켜 그의 몸에 들어간다. 남자가 여자를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 손오공이 빠져나온다. 남자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 채 어리둥절해한다.
그리고 걸어가는 손오공의 뒷모습을 보며 한마디 한다. 저 사람 생긴 게 이상하네. 여자가 받는다. 나도 봤어, 꼭 개 같아.
중국 쪽 해석은 여러 갈래로 갈린다.
가장 널리 퍼진 것은 자기가 자기를 비웃었다는 읽기다. 석양무사는 지존보의 다음 생이고 손오공은 지존보 자신이다. 한 사람이 두 몸으로 나뉘어 성벽 위아래에 서 있다. 위에 있는 쪽은 사랑을 얻고 아래에 있는 쪽은 돌아선다. 얻은 쪽이 잃은 쪽을 개 같다고 부른다.
두 번째 갈래는 은혜와 무지에 관한 읽기다. 저 남자가 여자를 끌어안을 수 있었던 것은 손오공이 몸에 들어가 밀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움을 받은 자는 그 사실을 모른다. 모를 뿐 아니라 도와준 자의 생김새를 흉본다. 그리고 도와준 자는 굳이 알려주지 않는다. 그냥 걸어간다.
사람이 사람에게 받는 것 가운데 알지 못하고 받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준 사람이 그것을 밝히지 않고 지나가는 일이 얼마나 흔한지를 이 짧은 대사가 건드린다.
세 번째 갈래는 신통력과 자유의 관계다. 손오공은 세상에서 가장 힘센 존재다. 요괴를 죽이고 사부를 지키고 세계의 흐름을 바꾼다. 그런 그가 자기가 원하는 한 사람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힘은 전부 있는데 정작 자기 몫은 하나도 없다. 신통광대하면서 운명에 끌려다니는 존재. 그것을 한 단어로 줄이면 개다.
네 번째 갈래는 배우 본인과 관련된 이야기다. 무명 시절 그가 어느 선배의 곁에서 기회를 얻으려 애쓰던 무렵, 그 선배가 자기를 두고 저 사람 개 같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일화가 중화권에 널리 돌아다닌다. 확인된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이 이야기가 계속 회자되는 이유는 있다. 성공한 뒤에 자기 영화의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그 말을 자기 입으로 다시 꺼냈다는 그림이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짚어둘 것이 있다.
이 인물은 하늘과 맞선 자라는 뜻의 제천대성(齊天大聖)이라 불린다. 지위로 치면 더 올라갈 데가 없다. 그런데 자기 인식은 개다. 가장 높은 호칭과 가장 낮은 자기 규정이 한 사람 안에 들어 있다.
종살격의 자기 인식이 대체로 이렇다. 일간이 극도로 약한 명이다. 사주 안에서 자기 자신이 가장 힘없는 존재다. 그가 얻는 지위는 관살의 것이지 자기 것이 아니다. 세상은 그를 대성이라 부르지만 본인은 자기가 무엇인지 안다.
주성치의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늘 밑바닥 인간인 것도 여기서 나온다. 무명 배우, 시골 무술가, 매 맞는 소림 제자. 그가 밑바닥을 상상해서 그린 것이 아니다. 자기 자리를 그린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볼 때마다 다른 것이 보인다. 정확히 말하면 작품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 달라진다.
스무 살에는 지존보만 보인다. 웃기고 서툴고 사랑에 빠진 남자다. 마흔에는 손오공이 보인다. 무언가를 짊어지느라 다른 것을 내려놓은 사람이다. 내려놓아 본 사람에게만 그 장면이 보인다.
무엇을 겪었느냐에 따라 보이는 층이 달라진다. 그러니 이 영화가 1995년에 이해받지 못한 것은 관객의 잘못이 아니다. 그때 그들이 아직 그 층에 도달하지 않았을 뿐이다.
명리로 돌아가면 이 삼십 년이 상관 하나가 관으로 흘러가는 데 걸린 시간이다.
상관은 혼자서는 관을 이기지 못한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깨진다. 재를 거쳐야 한다. 재를 거친 상관은 관을 무너뜨리는 대신 새 관을 세운다. 문화 쓰레기라 불리던 것이 정전(正典)이 되는 경로가 이렇다.
다만 이 경로에는 정해진 소요 시간이 없다. 십 년이 걸릴지 삼십 년이 걸릴지, 아니면 끝내 도착하지 못할지는 만든 사람이 정하지 못한다.
1995년의 주성치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종살로 넘어가기 위한 과정
종살....나를 버리고, 어쩔수 없는 무게를 짊어져야 하는 삶
종살 직업을 위해서, 사랑하는 연인이 바라던 결혼을 안하고,
그 결과 연인을 잃고 평생 후회
종살이기에 완벽주의, 폭군이란 이야기를 듣는 것
그러나 그 역시 어쩔수 없음이라는 것
그때 그가 받아들인 것과 지금 사람들이 그 작품에서 읽어내는 것이 같은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성벽 아래를 걸어간 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성벽 위에서 그 뒷모습을 본 쪽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끝내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