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는 맞히는 것이 아니라 푸는 것이다 [사부가 쓰신 글]
사주를 본다는 일에는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산명(算命)이고, 하나는 해팔자(解八字), 곧 사주를 푸는 일이다. 이름은 비슷해 보여도 그 둘은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대다수의 손님은 이 차이를 모른 채 술사를 찾고, 대다수의 술사 또한 이 차이를 넘지 못한 채 평생 산명만 하다 끝난다. 이 글은 그 갈림길에 관한 이야기다.
먼저 산명이라는 이름부터 짚는다. 산명, 곧 명(命)을 셈한다는 이 말은 천 년을 써 온 속언(俗言)이다. 이름 자체가 듣기 좋지 않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이 단어가 사람에게 운명은 이미 정해졌다는 느낌, 곧 명정론(命定論)을 심는다는 데 있다. 그런데 정작 산명을 받은 사람은, 흉한 일을 만나거나 막힌 관문 앞에 서면 그때부터 그 정해진 것을 바꾸고 싶어 한다. 여기서 이미 모순이 생긴다. 명 속에 정해진 것이라면 어떻게 바꾼다는 말인가. 그래서 진짜 공부가 된 술사라면 이 단어를 되도록 적게 쓰는 편이 낫다.
조금 안다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잘 아는 술사에게 운세를 보고 유년(流年)을 살펴 참고로 삼는다. 그 일도 자리를 바꾸면 여전히 산명이라 불린다. 이름은 그렇게 따라다닌다.
솔직히 말해, 전통적인 산명은 열에 여덟아홉이 강호(江湖: 점집 열어서 영업하는 사람들)의 술사다. 특히 낯선 손님을 마주할 때 그렇다. 간판을 걸고 영업하는 술사는 사람을 불러들여 보아 주는 것이 본업이니, 손님이 무엇을 요구하든 받아 줘야 한다. 시간은 짧고, 사주가 풀렸든 안 풀렸든 일단 무언가를 말해 줘야 한다. 그러다 보니 강호의 술사들에게는 자연히 여러 수단이 생겼다.
첫째는 완상(玩象)이다. 사주 안에 이미 들어 있는 생극제화(生克制化)와 형충합해(刑沖合害)의 상(象)을 가지고 일을 판단해 주는 것이다. 목적은 분명하다. 손님을 믿게 만드는 것이다.
둘째는 신살(神煞)을 쓰는 것이다. 이것은 눈먼 술사, 곧 맹사(盲師)들이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이다. 이 방법으로 몇몇 유년을 정확히 짚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추가하자면, 셋째는 각종 잘맞는 기법들이 있다. 이런건 무조건 맞출 확율이 70%정도 되는 것, 그것은 일종의 구결인데, 그것만 이야기 한다. 넷째는 성격 위주로 이야기 한다. ]
이 두 가지를 쓰는 술사를 사기꾼이라 부를 수는 없다. 완상과 신살을 제대로 쓰는 술사에게는 천인감응(天人感應)이 작용하고, 보는 자와 보이는 자 사이의 인연(緣)이라는 요소도 분명히 있다.
다만, 처음부터 이 두 가지로만 들어가는 술사는 사주를 풀 시간이 결코 없다는 것이 문제다.
셋째는 순전한 강호의 기술이다. 가볍게 두드려 보고 크게 파는 수법, 곧 경고이향매(輕敲而響賣)다. 이를테면 "아버지는 살아 계시고 어머니가 먼저 가신다(父在母先去)" 같은, 손님의 반응을 떠보는 말이 이 부류에 든다. 손님의 표정 한 번에 다음 말이 정해진다.
이 세 가지는 내가 말하는 해팔자가 아니다. 정말로 그 손님과 인연이 닿은 경우를 빼면, 이런 술사의 서비스는 사실상 손님을 응대해 주는 일에 가깝다. 이 현상이 왜 이토록 성행하는가.
거기에는 보러 오는 사람 자신의 책임도 있다. 대개는 병이 급해 아무 의원에게나 달려가는 격(病急亂投醫)이다. 눈앞의 술사가 신선이기를 바라며 온다. 어떤 이는 그저 모르기 때문이고, 어떤 이는 값싸게 보려 하기 때문이다. 한때 떠돌던 말처럼, 단돈 몇 푼으로 인생 한 판 크게 뒤집기를 사려는 마음 말이다.
(남들이 잘 맞췄다니까, 매체에 나오니까, 누가 용하다니까... 보러가는게 현실이고, 일종의 엔터로 생각하니까, 진지하게 생각하면 미신이라고 욕먹을까봐? )
그렇다면 내가 말하는 해팔자란 무엇인가. 사주의 격국(格局)과 체(體), 용(用), 희(喜), 기(忌)를 분석해 내는 일이다. 이 가운데 격국과 체용(體用)은 확정적이다. 사주 여덟 글자가 정해진 이상 격국과 체용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희기(喜忌)는 상대적이다.
상대적인 희기란 무엇인가. 어떤 한 글자, 또는 어떤 한 오행(五行)이 지금은 희신(喜神)일 수 있어도 나중에는 희신이 아닐 수 있고, 지난날에는 기신(忌神)이었어도 지금은 기신이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이야기를 더 깊이 끌고 들어가면 내행(內行 전문가), 곧 안에서 제대로 닦은 사람만이 알아듣는다. 반푼이 술사들은 이 판단을 좀처럼 믿지 못한다. 나 역시 진실로 정성을 다해 온, 마땅히 믿게 해 주어야 할 손님 앞에서는 완상과 신살을 쓴다. 다만 그것은 사주를 다 풀어낸 다음의 일이지, 풀기 전의 일이 아니다.
여기서 내 식으로 한마디 더 보탠다. 격국과 체용이 확정적이고 희기가 상대적이라는 이 구도는, 용신(用神)을 하나로만 보아서는 결코 잡히지 않는다. 격을 세워 그 격이 무엇으로 사는지를 보는 격용신(格用神)이 있고, 한 사주의 기운이 어디로 치우쳐 무엇으로 균형을 잡아야 하는지를 보는 평형용신(平衡用神, 일부에서는 체용신이라 부른다)이 있으며, 한난조습(寒暖燥濕)의 조후(調候)를 포함해 그 명의 기운이 때를 따라 어떻게 흐르는지를 보는 기수용신(氣數用神)이 있다. 격국과 체용이 확정적이라 함은 앞의 두 자리에 해당하고, 희기가 상대적이라 함은 세 번째 자리, 곧 기운이 세월을 따라 흐르며 어제의 희신이 오늘의 기신이 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술사가 용신을 한 덩어리로만 쥐고 있으면 이 상대성을 설명할 길이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술사가 상대적 희기 앞에서 막히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해팔자에는 반드시 명확한 격국의 설명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주는 격국이 하나가 아니다. 이때는 조건을 붙여 미래를 측산(測算)해야 한다. 의원이 환자를 볼 때 보고(望) 듣고(聞) 묻고(問) 짚어 보는(切) 네 가지를 다 쓰듯, 술사도 손님의 협조를 받아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나로서도 그 사람의 격국이 어느 길로 갈지를 추측할 수밖에 없고, 이후의 예측 또한 "아마도 그럴 것이다(可能是)"라는 정도의 말에 머물게 된다.
격국이 하나로 고정되지 않고 운(運)을 따라 옮겨 가는 일, 곧 격이 변하는 일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성격(成格)이었던 것이 대운(大運)을 만나 무너지기도 하고, 파격(破格)이었던 것이 도리어 길을 얻기도 한다. 그래서 사주 여덟 글자만 보고 평생을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같은 여덟 글자라도 어느 운의 길목에 서 있느냐에 따라 희기가 뒤집힌다. 이것을 읽어 내는 것이 곧 상대적 희기를 다루는 일이며, 해팔자의 가장 어려운 대목이다.
해팔자는 처음부터 일을 단정하는 단사(斷事)로 시작하지 않는다. 먼저 사주의 격국과 체용을 분석하는 데서 시작한다. 들어오자마자 칼부터 휘두르지 않는다. 사람 대부분에게는 그 상대적 희기가 있고, 이것이 가장 판단하기 어렵지만 동시에 미래를 예측하는 근거가 된다. 술사가 희기를 정확히 연구해 두면, 조금이라도 아는 손님은 자기 명을 스스로도 헤아릴 수 있게 된다.
좋은 술사는 손님을 평생 자기 앞에 묶어 두는 사람이 아니라, 손님이 자기 명의 이치를 알아 가도록 길을 열어 주는 사람이다.
소수의 손님은 자리에 앉자마자 매우 구체적인 것을 묻는다. 그러나 실제로 술사가 강호의 수단을 쓰지 않는 한, 누구도 한눈에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볼 수는 없다.
간판을 건 술사일수록 이런 손님을 가장 많이 만난다. 그런데 마침 어떤 술사가 완상으로 그 구체적인 것을 짚어 맞히면, 손님은 크게 기뻐하며 이번에야말로 신선을 만났다고 여긴다. 그것은 착각이다. 손님이 믿는 기색을 보이면, 술사는 그를 응대하느라 더는 머리를 써서 사주를 풀려 하지 않는다. 계속 완상으로 간다. 이런 술사의 단사는 조각조각 흩어진 것이라 하나로 이어지지 않는다. 손님이 미래를 급하게 물어 대면 술사는 사주를 풀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결국 하고 싶은 대로 말하게 된다. 손님은 그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여기까지가 사부님 글 , 가로친 부분은 내가 덧붙인 이야기
여기서 오늘날의 간명(看命) 시스템을 들여다본다. 지금의 대면 간명은 구조 자체가 사주를 자세히 풀 수 없게 되어 있다.
술사에게는 한 사람의 여덟 글자를 깊이 분석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손님 또한 사주를 적어 내자마자 술사가 곧바로 무언가를 쉴 새 없이 말해 주기를 기대한다. 술사는 자리를 메우려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 하고, 손님은 묻고 술사는 답한다. 그렇게 묻고 답하는 사이에 정작 사주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은 사라진다. 묻는 말에 맞장구치는 일이 곧 간명이 되어 버린다.
요즘은 문서로 답을 적어 주는 시스템도 더러 보인다. 겉으로는 정성껏 자세히 보아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문서가 정말 사주를 깊이 풀어낸 결과인지는 따져 볼 일이다. 양식에 맞춰 항목을 채운 부분 해석을, 분량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깊이 본 것이라 할 수는 없다. 단순한 부분 해석과 사주의 비밀을 끝까지 풀어내는 일은, 실력에서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내가 대다수의 역술인을 중수(中手) 이하라고 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유년 몇 개를 짚고, 신살 몇 개를 걸고, 상을 굴려 손님을 믿게 만드는 일은 중수의 영역이다. 진짜로 그 사주의 비밀을 풀어낼 수 있어야만 비로소 고수(高手)라 부를 수 있다. 격국을 세우고, 체용을 가르고, 운을 따라 뒤집히는 상대적 희기를 읽어, 흩어진 조각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진 명의 줄기를 보여 주는 사람. 그것이 고수다.
세상에는 사주를 익히려면 수만 명의 명조(命造)를 보아야 한다는 말이 떠돈다.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 같은 책에서도 비슷한 결의 말을 만난다. 많이 보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 쌓은 것이 대개는 부분 해석의 경험치라는 점이 문제다. 수를 채워 손에 익은 패턴이 늘어난 것과, 한 사람의 명을 격국과 체용과 희기로 끝까지 풀어내는 안목이 선 것은 다른 일이다. 나는 전자를 고수로 보지 않는다. 무슨 비전(秘傳)의 필살기 한 수가 따로 있다는 식의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다. 한 방으로 모든 것을 꿰뚫는 비결이 어딘가 숨어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아직 고수와 거리가 멀다는 표시다. 비밀은 한 수에 있지 않고, 여덟 글자를 끝까지 풀어내는 그 길 전체에 있다.
그러니 다시 물어볼 일이다. 당신이 받은 것은 산명이었는가, 아니면 해팔자였는가. 당신 앞의 사람은 당신의 표정을 읽고 있었는가, 아니면 당신의 여덟 글자를 읽고 있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