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학 교과서를 쓴 사람들의 이력서
명리학 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골목 끝 작은 간판, 붉은 등, 방석 깔린 좌식 테이블. 혹은 사주 카페,, 혹은 인터넷 사주
각종 공짜 사주, 네이버 엑스퍼트, 앱 , 심지어 인공지능도 봐준다.
게다가 6개월이면, 창업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분도 많다.
노후를 위해서 배워라, 그런 사람도 있다.
그런데, 명리학이 과연 쉬운 학문이냐?
이 학문의 교과서를 쓴 사람들의 이력서를 펼쳐 보면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장관이 있고 재상이 있다. 나라에서 제일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 줄줄이 나온다.
먼저 당나라의 이허중(李虛中)이다.
사주를 연월일시 네 기둥으로 보는 방식의 출발점에 선 인물이다. 진사(進士)에 급제한 뒤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까지 올랐다. 요즘으로 치면, 최고로 어려운 국가시험을 통과하고 감찰 기관 고위직에 앉은 사람이다. 당나라의 진사가 어떤 개념인지 잘 안 와닿을것 같아서 이야기하자면, 당나라 인구는 대략 8000만명으로 이야기 된다. 그리고 300년동안 총 7000명의 진사가 나왔다. 1년에 20-30명 나왔다는 것, 어떤 실력이어야 하는지 알겠나? 그냥 서울대 합격 수준이나, 사법고시 통과 수준이 아니란 이야기다. 어떤 이야기가 있냐? 三十老明經, 五十少進士. 30살에 명경과를 통과하면 늦은거고, 50살에 진사를 통과하면 이른거다. 그 정도로 수재들, 천재들이 수십년을 준비해야 되는게 진사라는 것.
이 사람의 묘지명을 누가 썼느냐가 더 볼만하다. 한유(韓愈)다. 그 당송팔대가의 한유. 시인 이하(李賀)도 그를 따랐다. 명리를 보던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그 누구를 당대 최고의 문장가가 존경했다는 이야기다.
한유가 진사 시험을 두고 남긴 말이 있다. 끝내 못 붙고 죽는 사람도 있고, 겨우 붙었을 때는 이미 머리가 반쯤 센 사람이 절반이라고 했다. 시인 맹교(孟郊)는 마흔여섯에야 급제했고, 그 기쁨을 시로 남겼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진사에 붙었다고 바로 벼슬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 뒤에 이부(吏部)의 심사를 또 통과해야 비로소 관직이 떨어졌습니다. 관문이 한 겹 더 있었던 셈입니다. 그렇기에 천재중의 천재급이란 이야기다.
만민영(萬民英)으로 넘어가 보자. 명나라 가정 연간의 진사다. (인구 8000만 : 3년에 300명 뽑음)
하남도 어사를 지내고 지방 참의로 나갔다. 중앙 감찰직과 지방 고위 행정직을 두루 거친 정통 관료다.
퇴직하고 뭘 했느냐. 집에 들어앉아 삼명통회(三命通會)를 썼다.
명리학 하는 사람이라면 책장에 한 권은 꽂아 두는, 그 두꺼운 책이다. 은퇴한 고위 행정관이 평생의 공부를 한 권으로 묶어 낸 셈이다. 점쟁이들이 쓴 책이 아니란 이야기다. 국가 탑급 수재가 쓴 책이란 것.
청나라로 가면 한 단계 더 올라간다. 청나라때는 인구 4억에 진사는 년 100명 정도 나왔다. 역시 대천재급이 되는게 진사였다는 이야기
청나라 역사 전체를 통틀어, 시험판에 발을 들인 동생(童生)이 수백만이었다. 그 가운데 첫 관문인 수재(秀才), 곧 생원(生員)이 된 사람이 약 사십육만이다. 거기서 향시(鄕試)를 통과해 거인(舉人)이 된 사람은 약 십오만으로 줄어든다. 그리고 그 거인들이 마지막 회시에서 다시 갈려, 진사 이만 육천이 남는다. (3년에 3백명 뽑음)
진지린(陳之遴), 호는 소암(素庵)이다. 과거에 급제하고, 청나라에 들어가 예부상서를 거쳐 홍문원 대학사(大學士)까지 지냈다. 대학사는 사실상 재상 자리다. 나라의 정책을 주무르는 위치다. 현재로 치면 국무총리에다 대통령 비서실장과 수석 정책보좌관을 한 몸에 합쳐 놓은 자리고, 그냥 임명직이 아니라, 학문으로 거기까지 올라간 것이다. 왜냐면 황가의 자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역할도 했던 자리인 것이다.
이런 사람이 쓴 책이 명리약언(命理約言)이고, 적천수(滴天髓)를 정리해 묶은 것도 그의 손을 거쳤다. 집안에 술수 관련 귀한 책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고 한다. 재상이 퇴청하고 사주책을 펴는 그림은, 익숙한 점집 풍경과는 거리가 멀지 않나?
이런 대학자들이 미신쟁이였겠나?
같은 청나라의 심효첨(沈孝瞻)도 건륭 연간의 진사다.
그가 쓴 자평진전(子平眞詮)은 지금도 명리 입문의 정석으로 읽힌다. 격국(格局)을 차근차근 논리로 세운 책이다. 진사가 쓴 글이라 그런지 문장이 흐트러지지 않고 한 칸 한 칸 쌓여 올라간다.
여기에 한 사람을 더 얹자면 유백온(劉伯溫)이다.
원나라 진사였고,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책사였다. 나라 하나를 설계한 두뇌다. 적천수에 주를 단 사람으로 전해진다. 개국공신이 짬을 내 명리서에 붓을 댄 셈이다.
그럼 진사가 대체 뭐길래 이름마다 따라붙는가.
진사는 과거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 사람이다. 시골에서 치르는 시험을 뚫고, 수도에서 치르는 시험을 뚫고, 마지막엔 황제 앞에서 치르는 시험까지 통과해야 거기에 닿는다.
단계마다 사람이 갈려 나간다. 평생을 매달려도 한 번을 못 붙고 늙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을 때 이미 머리가 희끗한 경우도 흔했다. 지금으로 치면 전국에서 손꼽히는 시험을, 그것도 여러 단계를 연달아 통과한 사람들이다.
명리학의 뼈대를 세운 책들은 바로 그런 머리들이 평생을 들여 쓴 물건이다.
황제도 가만있지 않았다. 청나라 때는 아예 황실에서 명을 내려 자평술을 정리한 책을 펴냈다. 어정자평(御定子平)이다. 어정(御定)은 황제가 정했다는 뜻이다. 길거리 학문이라기엔 발주처가 꽤 높다.
이력서를 다 펼쳐 놓고 보면 한자리에 묘한 사람들이 모인다. 문장가가 존경하던 감찰관, 은퇴한 고위 행정관, 한 나라의 재상, 개국공신, 그리고 황제까지.
명리학이라는 책장을 채운 저자들의 면면이 이렇다.
이 학문을 두고 가볍게 말하는 사람을 만나거든 한 번쯤 물어볼 만하다. 그 교과서, 누가 썼는지는 아느냐고?
그래서, 명리학은 어려운 학문이 맞다.
그렇기에 중수도 극소수다. 물론 자칭 고수는 많지만,,,